1904년 5월 6일 창덕궁에서 대단한 파티가 열렸다. 한때 규장각으로 쓰였던 후원 주합루에는 대형 국기가 걸렸고 칼 찬 군인들이 사방에 우글거린다. 서양 외교관도 눈에 띈다. 흰옷 입고 흰 갓 쓴 민간인도 눈에 띈다.

이날 자 '황성신문'은 행사를 이렇게 예고했다. '경성의 일본 거류민 등이 오늘 창덕궁에 우리 대신 약 50~60명을 초청해 전첩 축하회를 연다고 한다.'(1904년 5월 6일 '황성신문')

1904년 5월 6일 창덕궁 후원 주합루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바글바글한 군인들은 그해 발발한 러일전쟁 참전 일본군이다. 닷새 전 들려온 청나라 구련성 전투 승전보를 기념하는 '전첩축하회'가 바로 대한제국 궁전에서 열린 것이다. 주한 외국사절은 물론 대한제국 고위 관료도 파티에 참석했다. 매국노들이 고물로 만들어버린 나라가 헐값으로 팔려나가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사진 속에서 주합루에 우글거리는 저 군인들은 일본군이다. 국기는 태극기와 일장기다. 닷새 전 청나라 구련성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물리치고서, 일본군이 벌인 전승 축하 파티다. 바다 건너 일본군이, 청나라 땅에서 러시아군을 누르고, 대한제국 구중궁궐에서 떼로 모여 일장기 걸어놓고 즐겼던 파티 이야기.

고물이 된 나라

1884년 갑신정변을 청나라 군사를 불러 진압한 이후 1894년 동학혁명까지 조선은 태평천국이었다. 청은 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서구 제국주의 국가는 그들 나름대로 손익을 따지며 조선에 무관심했던 10년이었다. 그사이 많은 일이 벌어졌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조선의 권력자들, 고종과 왕비 민씨 세력은 나라를 개조할 생각보다는 권력을 강화하는 데 열중했다. 그 결과 군사력은 미약했고 경제력은 더 미약했다. 부패한 집권층은 청, 러시아, 미국에 의지해 권력 유지를 기도했고 백성은 그 강화된 부패 정권에 더욱 시달렸다. 학정에 시달린 백성이 들고일어난 사건이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다. 농민을 진압할 군사조차 없던 조선정부는 결국 다시 한 번 청나라 군사를 불러들였고, 이에 함께 출병한 일본군이 일으킨 전쟁이 청일전쟁이었다. 1895년 러시아에 기대려는 왕비 민씨가 일본인에게 살해됐다. 그 강압에 소극적으로 저항한 사건이 1896년 아관파천이었고, 1897년 대한제국 건국이었다. 그때 일본은 조선을 놓고 러시아를 상대로 힘을 재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생명체로는 빈사상태에 빠져 있었다. 물건으로 치면 고물이 돼 있었다.

난파선을 버린 쥐떼들

1904년 정초부터 러·일 간에 전운이 감돌았다. 나라를 완전히 고물로 만들어버린 매국적들이, 헐값이 된 나라를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1월 11일 오후 외부대신 이지용은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에게 사전에 요구했던 '황제를 회유하는 데 필요한 활동비 1만원' 전액을 받아갔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8권 '한일밀약 체결 예상 및 한정 회유상황 등 보고' 1904년 1월 11일) 1만원만 주면 한반도를 전쟁에 필요한 일본군 군용지로 만들어주겠다는 뜻이다.

8일 뒤 이지용은 궁내부 특진관 이근택, 군부대신 민영철과 함께 하야시에게 황제 위임장을 들고 왔다. 이들은 하야시에게 "생명을 걸고 본건 성립에 온 힘을 다할 작정이니 (일본) 제국 정부에서도 충분한 신뢰해 주기 바란다"며 "만일 위험이 신상에 발생하게 될 경우에는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구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8권 '한일밀약체결안 협의진행과정 보고 건' 1월 19일)

2월 8일 러일전쟁이 터졌다. 황제 고종은 전시 중립국을 선언했다. 외교력과 군사력 없는 선언을 일본은 즉각 무시했다. 2월 12일 대한제국 정부는 각 군(郡)에 '군내를 통과하는 일본군에 숙박 및 군수 일체를 협조하라'고 명을 내렸다.(각사등록 근대편 '연도각군안5' 1904년 2월 12일), 20일에는 한성 시장에게 '일본 북진군 군수품 수송 인부 600명을 지체 없이 모집하라'고 명을 내렸다.('한성부래거안1' 1904년 2월 21일) 나라를 일본군 군용으로 내준 '한일의정서'는 이틀 뒤에야 체결됐으니, 나라를 책임지던 자들은 이미 그 나라를 땡처리로 판매 중이었다.

일본인의, 일본인을 위한 가든파티

그리고 열린 파티가 창덕궁 전승 축하잔치였다. 파티에 얼굴을 보인 군상(群像)은 다양했다. 황제는 이날 정3품 홍순욱을 '일본 진북군 접응관'에 임명해 파티에 대신 참석시켰다.(1904년 음력 3월 21일 '승정원일기') 의정부 참정 조병식과 의전 담당 예식원 예식경 민종묵도 참석했다. 조선인은 흰옷을 입고 흰 갓을 썼다. 때는 헌종의 계비 홍씨의 국상 기간이라 백립과 백의, 백대 착용이 의무였다.

2019년 창덕궁 주합루.

사진 속 주합루 2층 가운데 기둥 오른쪽에 서 있는 양복 차림 사내는 군부대신 윤웅렬이다. 그 앞은 그의 자식들이다. 그 아래층에 파티에 초대된 주한 외국 인사들이 보인다. 공식적인 파티 주관을 일본인 거류자들이 했으니 일본 복식을 한 사람들도 눈에 띈다. 윤웅렬의 아들인 개화파 지식인 윤치호도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윤치호는 이날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그 아름다운 곳이 일본인들 환성으로 가득 찼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의 실정이 수치스럽게도 이 나라를 붕괴시켰다. 무엇보다 슬픈 일은 황제에게서도, 비굴하고 부패한 신하에게서도 끔찍하게 생기를 잃은 대중에게서도 조선의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윤치호일기 1904년 5월 6일)

1년 뒤 열린 또 다른 일본인의 궁궐 파티

러일전쟁이 일본 쪽으로 승기가 기울던 1905년 5월 25일 한성 남대문역에서 경부선 철도 개통식이 열렸다. 개통식에는 일본 황족 후시미노미야(伏見宮) 히로야스(博恭) 왕이 참석했다. 다음 날 대한제국 궁내대신 박제순은 일본 관련 인사들을 창덕궁으로 초대해 원유회를 개최했다. 주합루에는 다시 한 번 한·일 양 국기가 교차돼 걸렸다. 일본인의 이 자축잔치에, 대한제국 군악대가 동원돼 축하연주를 했다.

1905년 5월 26일 창덕궁 주합루에서 일본인들이 벌인 경부선 개통 축하 가든파티에 동원된 대한제국 군악대.

대한제국 군악대는 1901년 창설됐다. 1896년 러시아 니콜라이 2세 즉위식에 참석한 민영환이 훗날 만든 군악대다. 군악대는 황제 생일과 각종 연회에 동원돼 연주했다. 군악대 교관은 일본에서 활동하던 독일 음악가 프란츠 폰 에케르트였다. 에케르트는 1880년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작곡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에케르트는 대한제국 국가도 만들어 제국 훈장 또한 받았다.(1902년 12월 20일 '고종실록') 작곡이 아니라 민요를 편곡했다는 최근 주장도 있다.

에케르트 지휘하에 대한제국 군악대는 군악대 연주홀로 건립된 파고다공원 팔각정에서 연습하며 실력을 쌓고, 각종 국가행사와 외교 행사에서도 연주했다.(김규도, '대한제국 군악대의 흥망과 잡지 '동명' 게재의 전모', 2017) 에케르트는 1916년 죽어서 양화진에 묻혔다. 대한제국 군악대는 1907년 8월 군대 해산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지고, 이후 '경성악대'라는 이름으로 민간 연주단으로 활동했다.

그 군악대가 친일 대신 박제순이 주선한 창덕궁 일본인들 잔치에 동원돼 연주한 것이다(위 러일전쟁 전첩축하회 사진 오른쪽 끝에도 군모에 오얏꽃 문양을 박은 대한제국 군인들이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군악대인지는 기록에 없다).

박제순은 6개월 뒤 외부대신 자격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했고, 다시 5년 뒤 내부대신 자격으로 한일합병조약에 참석했다. 나라를 고물로 만들어버린 자들이, 참으로 헐값에 그 나라를 팔아치웠다.

일본군이 총살한 대한제국인… 일본군을 위문한 대한제국

창덕궁 파티가 끝나고 넉 달이 지났다. 일본군은 군사를 실어 나를 경부선 철도를 건설하며 대륙 침략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해 9월 20일 오전 10시 철도 건설을 방해하다가 검거된 아현동 사람 김성삼, 안양 사람 이춘근, 신수철리 궁방동 사람 안순서가 일본군에게 총살당했다. 뒤늦게 보고를 받은 한성판윤 김규희가 간부들을 급파했으나 처형은 끝났다.(각사등록 근대편 '한성부래거안1' 1904년 9월 21일) 한 달 뒤인 10월 26일 황제는 '먼 땅에서 여러 달째 비바람을 맞고 있는' 일본군을 위로하려고 육군 부장 권중현을 위문사로 보냈다.(1904년 10월 26일 '고종실록')

1904년 9월 경부선 철도 훼손 사건으로 일본군에 의해 총살된 조선인들.

두 달 뒤 1904년 12월 31일 의정부 참정 신기선이 "백성이 도탄에 빠진 것이 (민란이 극성했던) 1862년과 (동학의) 1894년보다 더 심해졌다"고 사표를 던졌다. 황제 고종은 "뜻이 간절하니 받아들인다"며 사표를 받았다. 같은 날 두 달 전 대륙으로 떠났던 위문사 권중현이 귀국했다. 권중현은 그날 법부대신으로 승진했다.(1904년 12월 31일 '고종실록') 나라가 그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