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네이딘 버크 해리스 지음|정지인 옮김|심심|448쪽|1만9800원

200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베이뷰 아동 건강센터. 소아과 의사인 저자는 7세 디에고를 미심쩍은 눈길로 진단하고 있었다. 디에고는 키가 4세 어린이 평균의 중간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성장 부진의 또렷한 이유가 파악되지 않아 어머니를 면담한 결과 저자는 디에고가 4세 때 아버지 친구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다른 환자 열 살 케일라는 아버지가 주먹으로 벽을 쳐 구멍을 하나 더 낼 때마다 천식이 재발했다. 마약중독자 아버지를 둔 여섯 살 소녀는 제1형 당뇨병을 앓고 있었다. '극심한 역경과 질병 간에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 저자의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책의 부제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신체 건강에 미치는 영향'. 저자는 임상 경험과 기존 연구를 바탕으로 어린이에 대한 학대와 방임이 성인이 되었을 때 심리적인 문제뿐 아니라 자가면역질환, 비만, 심장병, 기대수명 단축 등 신체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급성장 중인 어린이의 뇌가 스트레스 호르몬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면역계 이상 등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1998년 미국 내과의사 빈센트 펠리티 박사와 로버트 안다 박사 연구팀은 정서적 학대, 신체적 학대, 성적 학대, 신체적 방임, 정서적 방임, 가정 내 약물남용, 가정 내 정신질환, 어머니가 폭력을 당함, 부모의 이혼 또는 별거, 가정 내 범죄행위 등 열 가지 범주의 'ACE(Adverse Childhood Experience, 부정적 아동기 경험)'를 설정한다. 이에 대한 18세 이전 노출 빈도에 따라 'ACE 지수'를 매긴다. 연구 결과 이들은 ACE 범주 네 가지 이상에 해당하는 사람은 지수가 0인 사람에 비해 심장병과 암에 걸릴 가능성이 2배 크고, 만성폐쇄성 폐질환에 걸릴 가능성은 3.5배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저자는 "어린 시절 부정적 경험이 뇌 발달에 심각한 영향을 끼쳐 신체 건강에도 문제를 일으킨다"며 "아동 건강과 발달 정도를 측정하는 공중보건 검사에 '유독성 스트레스 검사'를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질병처럼 아동기 학대로 인한 질병도 조기 발견이 중요하다. 사랑을 품은 양육자의 지원, 수면, 운동, 영양, 명상 등이 치료법이 될 수 있다. 저자는 공중보건 차원에서 모든 어린이를 대상으로 ACE 지수 측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자칫 저소득층 유색인 아이들에게 '뇌가 손상된 아이들'이란 꼬리표를 붙일 수 있다는 거센 반발에 부딪힌다. 그러나 펠리티 박사 팀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 전체 인구의 67%가 한 가지 이상의 아동기 부정적 경험에 노출됐다. 어릴 때 부정적 경험을 한 사람들 가운데 70%가 백인이고, 70%가 대학 교육을 받았다. 자메이카계 미국인인 저자가 샌프란시스코 부유층 거주지에서 만난 '잘나가는 여성들' 모임 참석자 열 명 중 다섯 명이 부모의 정신질환이나 중독, 성폭행, 가정폭력 등에 시달렸다고 털어놓았다. "사람들이 트라우마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이유는 그것이 정말로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연구를 확장시키며, 각종 장애물을 뛰어넘어 마침내 '아이들을 위한 웰니스 센터'를 설립하는 저자의 사명감이 감동을 준다.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한 그의 TED 강연은 900만 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했으며, 저자는 지난 1월 캘리포니아주 공중보건국장으로 임명됐다.

책 머리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간 에번이라는 남성의 사례가 소개된다. 의사들은 "43세 남성, 비흡연자, 위험 요인 없음"이라 진단했지만, 저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에겐 뇌졸중에 걸릴 위험을 두 배 높인 심각한 요인이 있다. 아동기에 겪은 부정적 경험이다." 책 끄트머리에서 저자는 에번의 어머니가 망상형 조현병 환자였고, 여러 해 치료 없이 방치되면서 자녀들에게 강렬한 불안과 스트레스를 주었다는 것, 그리고 에번이 자신의 오빠란 사실을 털어놓는다. "어린 시절 부정적 경험을 하며 자란 사람들이 자신의 유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첫걸음은 그것의 상태를 평가해 파악하고 그 영향과 위험을 비극도 동화도 아닌, 의미 있는 현실로서 명료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믿는다. 각자 이 문제를 직시할 용기를 가질 때, 우리의 건강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생길 것이라고." 원제 The Deepest 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