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범(55) 전 국가대표 농구선수는 정원 가로등보다 더 컸다. 머리와 수염을 기른 모습이 흡사 도인 같았다. 2m7㎝로 농구하고, 사업하고, 웃기고, 아팠다. 큰 키는 그에게 힘이자 짐이었다.

"흔히 시한부 인생이라는 말을 쓰는데 저는 '돌연부 인생'을 살았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가슴에 있었어요. 길 가다가, 운전하다가,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돌연 심장이 멈출 수 있는 병이었죠. 예순까지만, 애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만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화장실에서 몰래 울었죠."

긴 머리를 뒤로 넘긴 한기범(55)이 도인처럼 초탈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1980~1990년대 농구대잔치를 기억하는 세대에게 한기범은 '2m 넘는(2m7㎝) 농구 전설'이지만 요즘 세대에겐 '웃기는 사람'이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멀대처럼 흐느적거리는 모습이 젊은 세대의 웃음 코드에 적중했다. '웃음'을 들으러 갔는데 그는 '울음'부터 말했다. 유전병 공포 때문에 죽음을 가슴에 꼬깃꼬깃 넣고 다녔다고 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웃음 유발자'가 됐다. "태국에 갔더니 히잡 쓴 여학생이 같이 '셀카' 찍자더군요. 지하철에서 '와, 연예인 처음 봤다'는 분도 있었어요(웃음)." 최근 SBS '런닝맨'에 이광수 닮은꼴로 몇 차례 출연했다가 '한류 스타'가 됐다.

지난 13일 서울 장충동 '한기범 희망나눔재단'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절망과 희망, 삶과 죽음이 뒤죽박죽이었던 그의 인생을 들었다. '싱거운 사람'이라는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며칠 우려낸 곰탕 같았다. 질문 하나하나에 낱말을 몇 번이나 꼭꼭 눌러 담아 답했다.

자장면, 탕수육에 홀려 공 잡아

농구에서 키는 곧 재능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중학교 2학년 때 공을 처음 잡았다. 당시 키 188㎝. 중2 평균 신장이 156.3㎝였던 시절이다. 클 뿐 아니라 달리기도 빨랐다.

―농구는 어떻게 시작했나요.

"그땐 키가 크면 배구, 농구, 씨름 선수 중 하나를 시켰어요. 씨름은 너무 말라서 안 됐고, 배구는 초등학교 때 잠깐 했는데 재미가 없더라고요. 중2 때 농구부에서 제안해서 시작했어요. 기본인 레이업도 제대로 못 했어요. 공 튀기는 것조차 서툴렀죠. 제 역할은 우리 선수가 못 넣은 공을 잡아서 넣거나 상대 선수 슛 쳐내기. 재밌긴 했는데 큰 매력은 못 느꼈어요. 훈련도 힘들었고요. 농구부가 없는 일반고(천안 북일고)로 진학했어요."

―훈련이 어땠기에요?

"시골이라 합숙 시설이 굉장히 열악했어요. 여관에서 추워서 벌벌 떨면서 잤어요. 아침에 손이 얼어 슛도 제대로 못 쐈어요. 운동이 이렇게 추운 거구나, 고생하지 말고 집에서 운영하는 과수원이나 나중에 물려받자 싶더군요."

―그런데 어쩌다 다시 돌아왔습니까.

"키가 워낙 크니까 가만두질 않더라고요. 서울에서 농구 관계자 몇 분이 저를 눈여겨봤나 봐요. 매일같이 집으로 찾아왔어요. 서울말이 어찌나 부드럽던지. 충청도 촌놈인 저는 '안 돼유' '싫어유'만 했는데 매일 자장면, 탕수육을 사주겠다는 분에게 혹하고 말았죠(웃음)."

그 후 한기범은 허재, 김유택과 함께 역대 최강이라 불리는 중앙대 농구팀의 일원이 됐다. 선수 생활 15년간 리그에서 우승 트로피를 놓친 건 단 한 번이었다.

―농구 인기가 최고였던 시절을 누볐지만 '허동택'(허재·강동희·김유택) 트리오의 조연이라는 인상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사실이죠. 셋이 워낙 걸출했으니까요. 그런데 저도 한가락 했어요."

―어떤 면에서요?

"5~7m 거리에서 중거리 슛을 쏘는 센터는 그때 저뿐이었어요. 상대가 속수무책이었죠." 1989년 농구대잔치 최우수선수(MVP)를 수상했다. 당시 장신 선수에게 중장거리 슛은 '금기'였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리바운드'였는데 슛을 하면 리바운드할 사람이 없다면서 감독들이 절대 중장거리 슛을 하지 말라고 했다.

―금기였던 중장거리를 아랑곳 않고 던졌다고요?

"그런 틀이 싫었어요. 아무도 안 막는데 넣을 수 있으면 쏴야죠. 구멍 생길 때를 대비해 안 쏜다니요. 은퇴하고 중앙대 코치 할 때 (김)주성(2.05m)이를 가르쳤는데, 얘도 멀리서 슛을 안 쏘는 거예요. 큰 그림을 보라고 했어요. 오히려 네가 멀리서 쏴야 수비를 밖으로 끌어낼 수 있어 공격이 더 원활해진다고. 저는 지금도 '안 되는 건 없다'는 주의입니다."

―은퇴를 1997년에 했지요? 프로 선수치고는 선수 생활(11년)이 좀 짧은 편인데요.

"무릎이 말을 듣지 않았어요. 계속 뛰고 싶어서 '대포주사'(강한 진통제)까지 맞았는데 너무 아픈 거예요. 몸이 은퇴를 선언한 거죠."

은퇴 몇 년 후 모교 중앙대에서 코치로 일했다. 강한 리더십, 스파르타식 지도가 먹히던 시절이었다. 선수가 말을 안 들으면 감독이 폭력이라도 써서 말을 듣게 해야 했다. "그쪽으론 영 안 맞았습니다. 결국 코트를 떠났어요. '키 크는 건강식품' '키 크는 교실' 등 사업을 벌였는데 실패했습니다."

“병이 아니었다면 나눔의 즐거움을 몰랐을 겁니다. 이제는 맹장염 정도의 불편이라고 생각해요.” 죽을까 두려워 화장실에서 몰래 운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허허실실 웃었다.

‘돌연부’ 인생

살아남은 건 순전히 운이었다. 신체가 스펙인 운동선수였지만, 그 몸이 발목을 잡았다. 20년 간격으로 아버지와 동생이 같은 증상으로 세상을 떠났다. 전조 없는 급성 심장마비. 키가 클수록 걸릴 확률이 높다는 희소 유전 질환 ‘마르판 증후군’ 때문이었다. 국내에서는 100만명 중 23명꼴로 발병하는 희소병이다. 마르고 긴 체형 때문에 대동맥과 폐동맥의 혈관 사이에 있는 막이 선천적으로 약하다. 시간이 지나면 대동맥이 풍선같이 늘어나거나 찢겨 심장마비로 돌연사할 위험이 크다. 유전 확률이 50% 정도라고 알려졌다.

동생 상(喪)을 치르자마자 병원을 찾았다. “조금만 늦게 왔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의사의 말에 급히 수술대에 올랐다.

―거인병이란 소문이 있었어요.

“거인병으로 알려진 말단비대증과는 다른 병이었어요. 2000년 중앙대에서 코치로 일할 때 동생이 세상을 떠났어요. 회사원이었는데 일하다 갑자기 책상에 쓰러졌어요. 심장마비였어요. 저도 갑자기 죽을 수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아내가 둘째를 임신 중이었는데 제가 아이를 지우자고 했어요. 유전이 두려웠습니다. 자식이 저처럼 고통스러워하는 걸 볼 자신이 없었어요. 그런데 아내가 그러더군요. 아이들 절대 안 아프게 잘 키우겠다고, 당신도 죽게 안 내버려두겠다고요.” 그는 “두려움을 극복한 건 심지 강한 아내 덕분”이라고 했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아들에겐 유전이 됐는지. 그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넉 달 전 아들 둘에겐 마르판 증후군이 없다는 최종 검진 결과를 받았습니다. 20년간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를 얹고 살았어요. 애들이 조금만 아파도 내가 물려준 병 때문인가 자책했으니까요. 둘 다 190㎝ 정도에서 더 안 커요. 무엇보다 통통해요.” 한기범은 “(아이들이 괜찮으니) 나는 이제 얼마든지 아파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마르판 증후군 환자는 매년 1~2회 검진을 받아야 한다. 골프, 테니스같이 급작스럽게 힘주는 운동은 금지다. 술도 주종 상관없이 한두잔만 허용된다. 선수 시절 주당으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맥주 한 병 마시면 과음이다.

―지금 몸 상태는 어떤가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의료 기술이 많이 발전했거든요. 2008년 재수술을 받았을 때 의사가 갑자기 발작할 일은 없을 거라더군요. 사실 ‘병에 걸렸다’는 표현이 어색해요. 신체적으로는 달라진 게 거의 없거든요. 지금 보면 공포를 없애는 수술, 마음을 치료하는 수술을 받은 셈이죠.”

―당신을 보고 병을 발견한 사람들은 고마워하겠네요.

“그렇지도 않아요. 키 큰 사람 중 마르판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종종 있어서 예방하자는 차원에서 알렸는데 환자들 모이는 인터넷 카페에 들어갔더니 욕투성이였습니다. ‘한기범이 마르판 환자라고 하고 다니니까, 다들 흐리멍덩한 줄 알아서 짜증 난다’ 같은 이야기들이었어요. 속상했습니다.”

도깨비냐고 했다, 그게 싫어 웃음 소재가 됐다

SBS ‘런닝맨’의 한 장면. 출연자 이광수가 웃음을 터트리면 벌칙을 받는 상황이었다. 미션 장소인 편의점 문을 열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 난데없이 등장한 한기범이 편의점 아르바이트 복장을 입은 채 특유의 힘 없는 눈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이건 반칙이다”라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언젠가부터 ‘한기범’은 고유명사가 됐다. TV에서 누군가 키 큰 출연자에게 ‘한기범씨’라고 하면 말 그대로 ‘빵’ 터진다. 한혜진, 이광수, 홍진경 등 장신 연예인은 모두 들었다. 카메라 앞에서 허우적대며 자기 희화화도 꺼리지 않는다.

―망가지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원래 사람들이 저를 무서워했어요. 어렸을 때만 해도 저만큼 큰 사람이 없었으니까, 도깨비인 줄 알았다고 하시는 어르신도 많았어요. 너무 싫었어요. 차라리 스스로 내려놓아 보자고 결심했어요. 그래서 2000년대 초반부터 방송에 나왔어요. 여장도 하고, 속살도 보여주고요. 그 뒤로는 주변으로 사람이 왔어요. 먼저 말을 걸어주더군요.”

‘SBS’ 런닝맨에 이광수와 함께 출연한 모습.

―10~20대에게 한기범이란 이름을 꺼내봤더니 ‘웃기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요즘 부쩍 알아보는 학생이 많아졌어요. 예전에는 멀리서 쳐다만 봤는데, 지금은 인사해요. 최근 런닝맨에 광수 닮은꼴로 계속 출연한 게 컸던 것 같아요. 제가 나올 때마다 시청률이 많이 좋았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그저께 녹화 때도 감독님이 무척 좋아하셨어요. 저는 그냥 가만히 있는데, 보기만 해도 웃긴가 봐요. 광수가 잘 맞춰줘서 그렇기도 하고.”

―모발도 이식했다고 알려졌어요. 외모 콤플렉스가 있습니까?

“세 번 했어요. 2009년쯤부터 3년간요. 아마 유명인 최초 모발이식이었을 거예요. 협찬해준다기에 해봤어요. 병원 측에선 제가 제일 잘됐다고 대대적으로 광고했어요. 창피하기도 했는데 머리카락이 많아지니까 자신감이 생겨요.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머리가 없으면 자신감을 잃고 사는 것 같아요. 지금은 젊었을 때 못 했던 장발 머리를 하고 다닙니다(웃음).”

―‘최초’로 시도한 게 많은가 봅니다.

“이끌어 나가는 걸 좋아해요. 허재 오기 전 (김)유택이랑 중앙대를 농구 강호로 만들어 놨고, 실업팀 기아 창단 멤버였죠. 서장훈, 최홍만, 하승진 등 ‘2m 예능인 계보’의 시조이기도 하고(웃음). 두 번째나 세 번째였으면 앞의 시행착오를 참고해 더 잘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현재 공식 직함은 ‘한기범 희망나눔재단 대표’다. 심장병 어린이에게 수술비 등을 지원하려고 2011년 설립했다. 2008년 사업 실패로 힘들 때 국내 심장병 재단의 도움으로 심장 수술을 받았다. “빚지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 자선 경기를 열어 재단에 기부했어요. 그 뒤로 기부에 흥미를 느껴 직접 재단을 운영하게 됐어요.” 해마다 여는 자선 경기와 1만원, 2만원 모이는 후원금으로 운영한다. 지금까지 약 40명에게 심장병 수술을 지원했고, 취약 계층 어린이를 위한 농구교실도 무상으로 운영한다.

―선수 다음으로 오래된 직업이네요.

“우습지만 50세 가까이 돼서야 적성을 찾았습니다. ‘기부 중독’이랄까요. 후원하는 분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짜릿할 정도로 뿌듯해요. 후원금으로 수술받은 어린이 부모님에게 ‘우리 아이 인생을 다시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들을 때는 송구스러울 정도죠.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이 이런 거구나 싶습니다.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평생을 키와 관련된 일을 했어요. 큰 키로 농구하고, 사업하고, 웃겼어요. 이제야 찾은 평생직장이 키와 상관없다는 게 아이러니하지요?”

―키 얘기로 돌아왔으니 물어봅니다. 현재 한국 남성 평균키가 173㎝라고 합니다. 보통 키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요?

“키가 190㎝만 됐어도 전혀 다른 인생이었을 거예요. 농구를 하지도 않았을 테고, TV에 출연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무엇보다 갑자기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공포, 아이들에게 병을 대물림할지도 모른다는 자책은 안 했겠지요. 평범한 키였다면 역사 선생님을 하거나, 아버지의 과수원을 물려받지 않았을까요? 학창 시절 역사를 좋아했었고, 어린 학생들이랑 어울리는 게 좋아요.”

―숨으려야 숨을 수 없는 신체 조건입니다.

“저는 마스크에 모자를 써도 다 알아봐요. 다른 유명인은 숨길 방법이라도 있는데, 저는 못 해요.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는 삶이 궁금해요.” 인터뷰하는 동안 행인 4명과 마주쳤다. 모두 한기범을 알아보곤 두 눈이 동그래졌다. 한기범의 말처럼 그의 인생은 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궤적을 그렸다.

―‘DNA가 정해준 삶’ 같다는 생각은 안 하는가요.

“결국 선택한 건 저예요. 어릴 때 농구가 정말 싫었으면 서울로 안 올라왔겠죠. ‘키 크는 건강식품’ 투자도 안 하려면 안 했고, 예능 프로그램도 안 나갔을 수 있었어요.” 신체는 유전의 영향이 크지만 인생은 후천적 결정이 지배한다는 얘기였다.

그에게 “큰 키가 ‘천형(天刑)’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병으로 심각했을 때는 그랬죠. 원망도 했지요. 그런데 살다 보니까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병이 아니었다면 나눔의 즐거움을 몰랐을 겁니다. 이제는 갑자기 쓰러지지는 않을 테니까, 맹장염 정도의 불편함이라고 생각해요.”

선수 시절 한기범의 트레이드 마크는 ‘터닝슛’이었다. 머리 하나 작은 수비수들이 딱 달라붙어 밀착 수비 해올 때 몸을 휙 돌려 슛을 쐈다. 코트 밖에서도 그는 터닝슛의 귀재였다. 온갖 역경과 슬픔이 삶을 압박해올 때마다 터닝슛을 했다. 코트의 센터는 인생에서도 센터를 내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