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콘텐츠학

하늘에 있는 용이 비를 내리면 땅에 사는 개구리가 이 빗물을 받아 먹는다. 하늘의 용과 땅의 개구리는 복식조이다. 동학혁명을 놓고 볼 때, 그 사상적 틀을 세운 수운 최제우(1824~1864)가 용이라면 전북 고창에서 판소리를 정립했던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1812~1884)는 개구리에 비유하고 싶다. 사람들은 용은 주목하였지만 개구리는 주목하지 않았다. 동학이라는 혁명 폭탄을 제조한 것은 수운이었지만, 그 폭탄이 터지려면 안전핀을 뽑아야 하는데 그 안전핀을 뽑은 인물은 고창에 살았던 신재효였다. 경상도에서 제조한 동학이라는 폭탄이 고향 경상도에서 터지지 않고 전라도에서 대폭발을 일으킨 데는 신재효가 깔아 놓은 떡밥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생각을 필자는 오래전부터 해왔다. 그 떡밥은 판소리 교육이었다.

최제우는 가난해서 20대에 10여 년을 전국을 떠돌며 행상을 하였다. 신재효는 이방과 호방을 지낸 중인 신분이었지만 재산 5000석을 지닌 부자였다. 5000석이면 요즘 개념으로 5000억 부자다. 신재효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고창의 경주인(京主人)을 하며 재산을 모았고, 고창에 내려와서는 관약방(官藥房)을 하며 재산을 모았다. 경주인은 그 지방 수령이 서울에 파견해둔 아전·향리를 가리킨다. 그 지역 사람들이 서울에 오면 숙식을 제공하거나 수령의 서울 민원 사항을 챙기기도 하고 때로는 필요한 자금도 융통했던 복합 출장소장이었다. 숙박·금융·로비스트를 겸한 자리였으므로 아주 실속 있는 자리였다. 신재효가 살았던 집터도 부자 터의 전형이다. 거대한 창고처럼 보이는 고창의 방장산(方丈山·743m)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고창 근방을 지나가다 보면 이 방장산이 네모반듯하게 잘생긴 모습으로 보인다. 그 방장산 기운이 정면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자리에 신재효의 집이 있었다. 신재효의 집터는 약 3000평 장원이었다. 그 담벼락 주변에 조그만 방 50~60여 개가 붙어 있었다. 일종의 기숙사였던 셈이다. 여기에는 고창을 중심으로 한 호남 일대의 밑바닥 계층, 즉 떠돌이·기생·상여꾼·광대 등이 모여들어 기식(寄食)하면서 판소리 공부를 하였다. 말이 판소리 공부이지 사실은 민초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의식화 교육’이 아니었나 싶다. 5000석 재산의 상당 부분을 여기에다 썼다. 그가 죽고 나서 10년 후에 동학의 전봉준이 고창에서 들고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은 신재효가 깔아 놓은 떡밥이었다고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