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는 딱 한 번 타보았다. 10년 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핀란드 헬싱키를 밤새 항해하는 선편이었다. 고작 하룻밤 운행이니 본격적인 크루즈라 보기 어렵지만 '폭음 유람선'으로 유명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주세가 비싸다 보니 두 나라 국민이 면세 기회를 누릴 수 있는 크루즈를 한껏 활용해 술단지도 채우고 밤새 질펀하게 음주도 즐겼다. 다들 앞다퉈 맥주를 몇 박스씩 수레에 담아 사가며, 출항 한 시간 이내에 음주의 결과물이라고밖에 여길 수 없는 토사물을 갑판에서 목격하는 수준이었다. 인도풍 서커스와 미러볼 아래에서 1970~1980년대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 등 폭음 유람선에 걸맞은 여흥이 풍성하게 벌어진 가운데 음식에 대한 기억은 티끌만큼도 남아있지 않다. 급식이 아예 없었거나, 있더라도 생선 튀김에 으깬 감자 수준인 스칸디나비아 일상 음식이 전혀 인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고작 열 시간 남짓 항해하는 크루즈야 그렇다 쳐도, 영화 '타이타닉'은 왜 그렇게 음식에 인색했던 걸까? 고백하건대 나는 이제야 타이타닉을 보았다. 1997년 개봉 당시 군 복무 중이라 생각도 못 했을뿐더러, 이후에는 그 유명한 두 주인공의 '십자가' 장면이나 셀린 디옹의 주제곡 '마이 하트 윌 고 온(My Heart Will Go On)'의 유행 때문에 이미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아 찾아보지 않았다. 그러다 음식이 궁금해 찾아 보고는 가벼운 직업적 분노에 휩싸였다. 빙산과 충돌해 침몰하고 만 나흘 동안의 여정을 무려 3시간 15분이라는 영화적 대장정에 담았음에도 음식에는 너무 인색했기 때문이다.
물론 타이타닉의 핵심 소재는 사랑과 재난이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기 위해 두 주인공이 극복해야 하는 계층 차이를 성실하게 드러내지 못했다. 복식이나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지만 아무래도 등장인물이 먹는 음식에 비하면 한계가 있다. 그런 가운데 음식의 구체적 묘사는 잭이 초대받은 일등석 만찬에 등장하는 캐비아와 삼등석에서 마시는 흑맥주가 전부였다. 이후 둘이 사랑에 빠지고 재난에서 살아 남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사이에 음식은 아예 증발해 버린다. 배가 침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악단은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는데 음식은 왜 그렇게 빨리,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그렇다고 기록이 안 남아있는 것도 아니다.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도 수많은 타이타닉 관련 사료 가운데 등급별로 다른 식사 메뉴며 공간 사진을 금방 찾아볼 수 있다. 계층 구분이 곧 객실 등급에 반영되는 시대였던 만큼 메뉴 또한 보는 것만으로 차이를 확 느낄 수 있다. 삼등석은 음식 가짓수도 적고 이름도 짧은 반면, 일등석 메뉴는 가짓수도 많을뿐더러 음식 이름도 장황한 수준으로 길다. 미국의 언어학자 댄 주라프스키가 '음식의 언어'에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타이타닉의 시대, 즉 100여 년 전에는 음식이 그다지 특별하지 않더라도 프랑스의 요리 용어로 표현해 고급스러움을 한 꺼풀 입히는 전략을 활용했다. 타이타닉이 음식 문화가 빼어나다고 볼 수 없는 영국의 배이다 보니 과연 음식들이 이름에 걸맞게 프랑스의 조리 문법에 충실했는지는 의구심이 들지만 그와 별개로 효과가 좋은 전략이었다.
타이타닉 승선객에게 최후의 만찬이었던 1912년 4월 12일의 1등석 메뉴를 살펴보자. 전채 둘, 주 요리와 채소 열넷, 디저트 넷까지 저녁 한 끼에 전부 스무 가지 음식이 제공된 가운데 절반인 열 가지가 프랑스의 조리법이나 식재료명 등을 빌려 썼다. 리옹식(式) 닭고기 지짐(Sautee of Chicken, Lyonnaise·양파 토마토 식초로 맛을 낸 닭고기)이나 푸아그라 파테(Pâoté de Foie Gras·푸아그라로 만든 페이스트), 초콜릿 바닐라 에클레어(Chocolate Vanilla Eclair·손가락처럼 길게 모양을 잡은 슈크림)처럼 별도 설명이 필요한 수준이다. 그나마 이해가 쉬운 몇 가지를 골라 예를 든 것이고 100년도 넘는 세월까지 감안하면 짐작이 잘 가지 않는 조리법이나 음식도 제법 있다.
프랑스 열풍은 2등석으로 내려가면서 거의 자취를 감춘다. 같은 4월 12일 저녁 메뉴의 18가지 식음료 가운데 프랑스식 요리법은 콘소메(Consommé·맑은 고기국물) 한 가지뿐이고, 나머지는 '칠면조 통구이와 크랜베리 소스' '치킨커리와 밥' 등 음식도 언어도 평범하다. 3등석으로 내려가면 '쇠고기 통구이와 갈색 그레이비 소스'처럼 음식과 언어가 평범한 건 물론 한술 더, 아니 덜 떠 가짓수도 단출해진다. 1·2등석에서는 끼니마다 별지의 메뉴를 쓸 정도로 식음료 가짓수가 다양하다면 3등석 메뉴는 모든 끼니가 한 장에 들어갈 정도로 적은 식음료가 제공된다. 그래도 최소 5~6가지의 먹고 마실 거리를 제공하는지라 해석 여지는 있다. 혹자는 이런 음식 차이가 요즘 여객기의 이코노미 클래스 수준이라 주장하는 한편, 3등석 음식이 단출할지언정 양에서는 인색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요즘 고급 레스토랑의 메뉴는 타이타닉의 그것처럼 길기는 길되 접근은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특히 프랑스 요리를 바탕으로 조리법을 표기해 일정 수준 예측이 가능했다면, 요즘은 주 재료를 나열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게 대세이다. 예를 들어 불고기를 '횡성 한우 우둔살(원산지를 꼭 표기한다), 배, 마늘, 생강, 대파'라고 표기하는 식이다. 이런 접근은 양날의 칼처럼 아직 식탁에 등장하지 않은 요리에 대한 호기심을 돋워주지만, 예측이 어려운 데다가 웨이터의 긴 설명으로 보완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혼선을 일으킬 수 있다. 한편 주라프스키의 분석대로라면 가격대가 올라갈수록 음식 선택 폭이 좁아지며(많은 고급 레스토랑이 고정 코스 한 가지만을 낸다), '셰프의 선택(Chef's Choice)'이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