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노동자들의 영웅으로 꼽히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전 대통령이 부패 혐의로 작년 4월 수감된 지 1년 7개월 만인 지난 8일(현지 시각) 석방됐다. '남미 좌파의 아이콘'인 룰라 전 대통령이 석방과 동시에 정치 활동을 재개하면서 퇴조 기미를 보이던 남미 '핑크 타이드(pink tide:온건 사회주의 좌파)'가 다시 득세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브라질 연방대법원은 지난 7일 "2심 재판의 유죄 판결만으로 피고인을 수감하는 것은 위헌"이라며 룰라 전 대통령을 석방하라고 판결했다. 룰라는 출소 하루 뒤인 9일 자택이 있는 상파울루 주(州) 상 베르나르두 캄푸 시에서 열린 축하 행사에 참석했다. 행사장에는 룰라가 창당한 '노동자당(PT)'을 상징하는 붉은색 티셔츠를 입은 시민 수천여명이 모였다. 룰라는 약 45분간의 연설에서 부패 혐의로 자신에게 징역형을 선고한 사법부와 현 정권을 "좌파를 범죄자로 몰고 가는 부패한 조직"이라고 공격하면서 "국민은 과거보다 더 굶주리고 있고, 직업도 없다. (공유 차량) 우버를 운전하거나, 자전거로 피자를 배달하는 게 고작이다. 브라질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지지자들은 "룰라는 무죄, 룰라를 대통령으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열광했다.
룰라는 브라질에서 국민 영웅으로 통한다. 선반공으로 일하다 정계로 뛰어들어 브라질 최초 노동자 출신 대통령이 된 성공 신화뿐 아니라 국가 부도 위기로 치닫던 브라질 경제를 회생시켰기 때문이다. 좌파 성향 대통령이었지만, 그의 경제정책은 보수적 측면이 많았다. 만성 채무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긴축 재정 기조를 유지했고, 경제성장을 통한 고용 창출이 빈곤에서 벗어나는 근본적인 길이라는 생각에서 기간산업에 투자해 일자리를 늘렸다. 노동자당에서 '신자유주의 척결'을 내세운 급진 세력을 밀어내고 중국 등 세계 여러 국가와의 교역을 확대했다. 룰라가 '실용주의 좌파'로 불리는 이유다.
이 같은 실용주의 정책 덕분에 룰라의 초반 집권 5년(2003~2008년)간 브라질은 평균 5%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며, 만성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탈바꿈했다. 2011년 1월 퇴임 시 브라질 여론조사 기관 '이보페'가 조사한 룰라의 지지율은 87%로, 경이적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룰라가 후계자로 내세운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탄핵돼 물러난 뒤, 그도 비리 스캔들에 휩싸이며 '룰라 신화'도 큰 상처를 입었다. 대통령 재임기인 2009년 건설 회사 OAS가 국영 에너지기업 페트로브라스의 계약을 따낼 수 있게 도와주는 대가로 OAS로부터 370만헤알(약 10억원) 상당의 뇌물을 수수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룰라는 이를 극구 부인했지만 뇌물수수·돈세탁 등의 혐의로 2017년 1심에서 징역 9년 6개월, 작년 1월 2심에서 12년 1개월을 각각 선고받았다.
룰라의 석방과 정치 활동 재개는 보우소나루 극우 정권이 집권한 브라질 정치뿐 아니라 남미 정치 지형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브라질 언론 폴랴 지 상파울루에 따르면, 룰라는 올해 말까지 전국 주요 도시를 찾아가는 '정치 카라반' 활동을 통해 자신의 지지층을 집결한 다음, 내년부터는 지방선거 준비에 몰두할 것이라고 전했다. 일각에선 벌써부터 룰라가 피선거권을 회복한 뒤 2022년 대선에 직접 출마하거나, 특정 후보를 지원하는 '킹 메이커' 역할을 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로이터 통신 등 주요 외신은 룰라의 석방으로 퇴조했던 남미 좌파 물결이 더 거세질 것으로 전망했다. 최근 남미의 정치 여건도 룰라에게 우호적인 분위기다.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좌파 알베르토 페르난데스가 승리한 데 이어, 이달 말 결선투표를 시행하는 우루과이 대선에서도 좌파 집권당 다니엘 마르티네스 후보의 승리가 점쳐지고 있다. 대선 부정 선거 시비에 휘말리긴 했지만, 좌파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도 4선 연임에 성공했다.
쿠바 통신사인 프렌사 라티나에 따르면, 9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푸에블라 클럽' 총회에서 페르난데스 등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일제히 룰라의 석방을 축하했다. 푸에블라 클럽은 남미 좌파·중도 좌파 지도자 30여명이 참여한 모임이다. 룰라는 총회에 "나는 자유이고, 싸울 준비가 됐다. 남미 지역의 강한 통합을 이루고 '위대한 남미'를 건설하는 것이 나의 인생 목표"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블룸버그 통신은 9일 "룰라가 조만간 남미 여러 국가를 돌며 좌파 지도자 결집에 나설 것"이라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