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베를린|이은정 지음|창비|260쪽|1만6000원

30년 전 오늘(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했다. 장벽을 무너뜨린 독일의 경험은 이제 그들에게 지나간 역사가 됐다. 하지만 분단 해소라는 숙제를 풀지 못한 한반도엔 성공 사례로 연구를 거듭해야 할 현재형 교훈이다. 1984년부터 독일에 머물며 베를린자유대학 교수(한국학)로 재직 중인 저자는 냉전의 치열한 각축장이자 분단의 최전선이었던 베를린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한반도 분단 극복의 실마리 찾기에 도전한다.

베를린을 둘러싼 국제정치는 이 도시를 동독 내 섬으로 고립시키고 동시에 둘로 쪼갰다. 저자는 그러나 분단을 낳은 정치역학보다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시민들이 기울인 노력에 주목한다. 1961년 장벽이 들어서기 직전까지 상대 지역에 있는 직장으로 출근하는 양측 주민이 20만명이나 됐다는 사실을 비중 있게 다루며 베를린은 결코 완전히 분리된 적이 없다고 강조한다. 동·서 베를린에서 상대방 우표를 사용한 편지를 반송하는 우편 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양쪽 주민은 상대 지역에 편지를 보낼 때 동·서독 우표를 모두 붙이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 결과, 우편 전쟁 사태는 당국 간에 서로의 우표를 인정하기로 하면서 종결됐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시민들이 장벽 위에 올라 환호하고 있다. '주의! 당신은 지금 서베를린을 벗어나고 있다'고 쓴 경고문 위에 누군가 '어떻게?'라고 낙서했다. 장벽 뒤로 브란덴부르크 문이 보인다.

1949년 이후 장벽이 들어설 때까지 동독을 탈출한 주민은 300만명에 이른다. 장벽은 물리적으론 서베를린을 둘러쌌지만 목표는 동독 주민을 장벽 밖에 가두는 것이었다. 동독 주민들이 크게 반발했다. 동베를린 일부 주유소는 경찰 차량의 주유를 거부하는 것으로 항의했다. 저자는 19세기 후반부터 조성된 도시 인프라를 둘로 나누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베를린 지하에 거미줄처럼 뻗은 하수도와 서베를린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는 도중에 동베를린을 통과해야 하는 지하철 노선은 베를린 주민들에게 이 도시가 원래 하나였음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고 썼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교류 옹호론을 펴지는 않는다. 동독이 끝내 장벽 설치를 강행하자 당시 서베를린 시장이자 훗날 총리가 되어 동독과의 화해 정책을 펴는 빌리 브란트는 시민들에게 동독 국영 철도가 운영하는 도시철도 탑승을 거부하자고 호소했다. "서베를린 주민이 낸 차비가 장벽 건설에 쓰여서는 안 된다"는 브란트의 주장에 시민들이 호응하며 도시철도 이용객 수는 1주일 만에 50만명에서 10만명으로 급감했다. 브란트는 동독 내 모든 인권 탄압과 고문, 협박 사례를 기록해 훗날 통일되면 범죄자를 기소할 증거 자료로 쓰자며 '잘츠기터 중앙인권침해기록보관소' 설립도 주도했다. 이후 동독의 정치범들은 가혹 행위를 당할 위험에 처하면 "잘츠기터에 알리겠다"고 경고했다. 동독인이 장벽을 넘다가 사살되면 총을 쏜 군인의 이름을 곁에 있던 동료 병사가 장벽 너머로 크게 외쳐 기록하게 했다. 저자는 이처럼 브란트가 교류 못지않게 동독인의 인권 신장을 위해 애쓴 사례들을 들며 한국 진보 진영이 "브란트의 신동방 정책 덕분에 독일이 통일됐다는 점만 보려 한다"고 꼬집는다.

저자는 통일로 향하는 길에서 동·서독 사이에 이루어진 여러 성취와 진전들은 '다름을 인정하는 합의'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는 협상 테이블에 올리지 않고 합의할 수 있는 것부터 합의한다는 '작은 걸음 정책'을 표방했다는 것이다. 정치적 이견에도 불구하고 교류를 확대하자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이산가족 방문은 고사하고 서신 교환조차 훼방하고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쪽은 북한 정권이다. 무비판적인 북한 편들기로 일관한 끝에 평화도 통일도 더 멀어져 버린 현 정부의 패착에서 벗어나려면 원칙을 고수하며 때로 채찍도 들 줄 알았던 브란트식 접근법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서독이 기여한 바를 소개한 책도 함께 읽으면 좋다. 이용준 전 외교부 북핵외교기획단장은 '대한민국의 위험한 선택'에서 서독의 모든 동독 지원은 동독인의 인권 신장에 초점을 두고 이뤄졌다고 말한다.

대담집 '통일의 길, 바로 가고 있는가'에서 이기주 전 독일 대사는 동·서독 간 민간 교류가 동독인들로 하여금 반체제 정서를 불러일으켜 통일의 밑거름이 됐다고 분석한다.

'얄타에서 베를린까지'(윌리엄 스마이저 지음)는 2차대전 패배에서 통일에 이르는 독일 현대사 전 과정을 입체적으로 조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