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거제시 계도마을 앞바다에 무인도가 하나 있다. 이름은 취도(吹島)다. 면적은 570평 정도다. 섬 서쪽 봉우리 위에는 탑이 솟아 있다. 기단 높이는 270㎝ 정도고 위에는 70㎝쯤 되는 포탄 탄두가 박혀 있다. 기단에는 ‘취도 기념’이라고 적혀 있다. 세운 때는 1935년 8월이다. 세운 사람은 일본 해군 중장 이치무라 히사오(市村久雄), 바로 바다 건너 진해에 있던 일본 해군 진해경비부 사령관이다.

탑 기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전쟁 때 함대가 밤낮으로 이 섬을 향해 함포 사격을 행했다. 그래서 섬 원형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일본 해군의 공훈은 이 섬에서 얻은 바가 많아 이 비를 세운다.'

전쟁 이름은 대마도해전이다. 1905년 5월 27일 대마도 앞바다에서 러시아 함대와 일본 함대가 맞붙은 전투다. 그 일본 함대 출항지가 거제도 송진포였다.

1904년 2월 10일 청나라 뤼순(旅順)에서 시작한 러일전쟁은 대마도해전을 끝으로 1년 3개월 만에 실질적으로 종료됐다. 취도는 당시 일본 연합함대의 함포 사격장이었다. 이후 수십 년 이어진 포격 훈련에 섬은 해골처럼 부서지고 쓰레기와 잡초가 무성하다.

왜 조선의 섬 취도는 일본 해군 포격에 파괴됐는가. 왜 러시아는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아시아 끝까지 와서 전쟁을 벌였나. 그때 조선 지도부는 무엇을 알았고 무엇을 했는가. 두 나라 모두 조선을 삼키려고 전쟁을 했다. 그 사이에 조선 지도부는, 파티를 벌이는 중이었다.

러시아의 동방정책과 조선

때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였다. 영국과 프랑스를 필두로 유럽 제국은 산업혁명을 통해 대량으로 생산한 대량 살상 무기를 대량의 군함에 싣고 아시아 국가를 식민지로 만들어갔다. 요체는 군사력이었다. 소극적으로는 국가 안보를 지키고 적극적으로는 약소국을 무자비하게 희생시켜 국익을 얻는 냉혹한 힘이었다.

경남 거제시 계도마을 앞에 있는 무인도 취도는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함대가 포격훈련을 했던 사격장이다. 1935년 일본 해군 진해경비부는 이 섬에 '러일전쟁의 기념물'이라며 기념탑을 세웠다. 형체를 완전히 잃은 섬 한쪽 능선에 기념탑이 보인다. 조선을 노리는 제국주의로 북새통을 이루던 그때, 조선 지도부는 세상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

1840년 영국과 청나라가 벌인 아편전쟁은 황제국 청의 '천하(天下)'를 무너뜨린 일대 사건이었다. 충격을 받은 일본 지도부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문호를 개방하고 1868년 서양식 근대화에 착수했다. 조선 지도부는 서양을 오랑캐로 배격하며 쇄국을 유지했다. 그 사이 일본은 지구상 최초의 비(非)백인 제국주의 국가로 변신해갔다.

유럽에는 가장 늦게 근대화에 뛰어든 러시아가 있었다. 1682년 황제가 된 표트르1세(1672~1725)는 서유럽으로 시찰단을 파견해 기술을 배웠다. 직접 프로이센과 네덜란드와 영국에 가서 포술과 조선술과 수학과 기하학을 배웠다. 돌아와서는 러시아 판 단발령을 내려 남자들 수염을 강제로 잘라버리고 여자들 치마를 잘라버렸다. 해군을 창설해 스웨덴과 전쟁을 벌여 발트해에 얼음이 얼지 않는 항구를 확보했다. 1762년에 등극한 예카테리나 2세는 폴란드를 집어삼키고 발칸반도와 크림반도로 영토를 넓혔다.

서유럽을 배워, 남으로 영토를 넓힌 것이다. 그러고 남은 곳이 동쪽이었다. 1891년부터 러시아는 모스크바 야로슬랍스키역부터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역까지 9288㎞짜리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건설해나갔다. 블라디보스토크역에는 이를 기념하는 탑이 서 있다.

서유럽 선발 제국들은 아시아를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인도를 향해 남하하는 러시아와 식민지 인도를 지키려는 영국 사이에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 끝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1853년 10월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이 벌인 크림전쟁에 오스만 편으로 참전했다. 1854년 3월 러시아령인 사할린 북쪽 캄차카 반도를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공격했다. 영국과 러시아가 박 터지게 전쟁을 벌이자, 1854년 일본은 두 나라를 배제하고 미국과 국교를 맺었다. 고래를 따라 온 미국 포경선이 동해를 누비고 다녔다. 영국과 프랑스는 울릉도와 독도(리앙쿠르)를 해도에 그려 넣고 동해를 누비고 다녔다. 1885년 영국의 거문도 점령도 남하하는 러시아 견제책이었다.

북새통이 된 조선과 지도부의 무지

거제도 취도에 서 있는 일본 해군 기념비. 함포 포탄 탄두를 꽂아 만들었다.

말 그대로 전 세계가 북새통이었다. 그 동쪽 중심에 조선이 있었다. 그런데 오로지 조선만이 이 북새통이 된 정황을 감지하지 못했다. 아무도 외부 세계에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최문형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한국 침략' 지식산업사, 2007, p91). 아니, 가지려 하지 않았다.

1887년부터 1905년까지 조선 정부가 일본에 파견한 조선 공사는 8명이었다. 그런데 18년 4개월 동안 실제로 공사가 현지에 재임한 기간은 6년 9개월이었다.(한철호 '한국근대 주일한국공사 파견과 활동' 푸른역사, 2010, p290) 외교관이 정보 수집과 외교 활동은 하지 않고 국내 정치에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 조선 지도부는 사회 체계를 갈아엎고 대량 살상 무기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일본을 목격할 수 없었다. 서유럽을 흉내 내 스스로 제국주의화한 일본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러시아가 뤼순을 차지한 사실이 무슨 뜻인지 조선 정부는 이해하지 못했다.

1882년 수교한 미국은 교역량이 미미하자 2년 만에 조선 주재 공사 지위를 대사급인 '특명전권공사'에서 '변리공사(총영사급)'로 강등했다.(최문형, p172)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그런 미국을 '큰형(Elder Brother)'이라고 불렀다(1897년 9월 13일 '한미 관계 자료집' '알렌이 국무부에 보낸 편지'). 도무지 세상 물정에 무지했던 그들이었다.

여기까지가 20세기 초 어느 무렵 조선의 무인도 취도가 도고 헤이하치로 함대 훈련에 형체를 잃게 된 경과다. 조선 옆에 일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가 조선을 포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정부는 이를 몰랐고.

1904년 제물포와 1905년 거제도

조선은 일본과 러시아의 맷돌에 끼여 속수무책인 상태였다.(주한 미국공사 윌리엄 샌즈, 'Undiplomatic Memories', 1930, p199) 조선 지도부는 러시아를 신흥 강국이라고 판단했지만, 전 세계 제국주의 국가들은 반(反)러시아였다. 1900년 고종의 '큰형'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러시아 견제를 위해 일본이 한국을 점유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김원모, '19세기 말 미국의 대한정책') 친청-친일에서 친러로 이어진 조선 정부의 외교 정책은 왕비 민씨 살해사건(1895년)과 아관파천(1896년)으로 이어졌다.

1904년 2월 3일 자 영국 잡지 '펀치(Punch)'에 실린 삽화. 러·일 양국이 조선 노인의 허리를 밧줄로 조이는 장면인데, '러일전쟁 와중에 조선이 엄중 중립(Strict Neutrality)을 선언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피비린내가 거칠게 퍼져가던 1904년 1월 21일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중립을 선언했다. 믿었던 러시아도 거부했고 일본도 거부했다. 이미 일본은 조선 각지 항구를 통해 군수품을 반입 중이었다. 한 달 뒤인 2월 10일 전쟁이 공식 개전했다. 이에 앞서 2월 9일 일본 함대는 제물포항에 도착해 러시아 함대에 올라 공격을 예고했다. 러시아는 항복 요구를 거부했다. 러시아군은 항구에 정박해 있던 각국 함대의 송별식 속에 팔미도 앞에 포진한 일본 함대에 곧바로 돌진했다. 참패한 러시아 해군은 남은 배를 자폭시켰다.(박종효, '한반도 분단의 기원과 러일전쟁', 선인, 2014, p249~271) 만 1년 3개월이 지난 1905년 5월 일본 연합함대가 지구를 반 바퀴 돌아온 러시아 발틱 연합함대를 궤멸했다. 시작도 끝도 대한제국 영토 내였다. 9월 5일 종전협정(포츠머스 조약) 두 달 뒤인 11월 일본은 대한제국에 을사조약을 강요해 외교권을 강탈해갔다. 협정을 성사시킨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발칸반도에 있던 몬테네그로도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두 나라는 102년 동안 교전상태로 있다가 지난 2006년에 깜짝 놀라서 교전상태를 종식시켰다.) 왜 이런 얼토당토않은 일이 벌어졌는가.

'잔치 잔치 열렸네'

최고 지도자 고종은 제후에서 대군주(1894년 갑오개혁)로, 대군주에서 황제(1897년 대한제국)로 스스로 수직 상승한 지도자였다. 1902년은 고종이 왕위에 오른 지 40년이 되는 해였다. 51세가 되는 망육순(望六旬)의 해이기도 했다. 그래서 잔치를 했다. 경운궁에 중화전을 짓고 서양식 석조전을 착공했다. 폐허가 된 경희궁까지 돌다리를 만들고(1902년), 프랑스제 촛대와 그릇을 구입해 잔치를 벌이고(황현, '매천야록' 3권), 평양에 360칸짜리 궁궐 풍경궁을 지었다.(1902년 5월 6일 '고종실록')

그해 여름 콜레라가 퍼졌다. 10월 본 행사는 1903년 4월 30일로 연기됐다. 1903년 초 지방에 있던 군사 1500명을 상경시켜 의장대로 훈련시키고 일본으로부터 VIP용 인력거 100대를 수입했다. 2년도 안 돼 100만원이 잔칫상에 사라졌다.(각사등록 근대편, '예식 때 각종 비용에 대한 예산외 지출 청의서') 1902년 국가 예산은 약 759만원이었다. 잔치 준비가 한창이던 1903년 1월 주재 외국 공사관 모임은 '현재 재정상 칭경예식은 무모한 짓'이라고 결론을 내렸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0권 '칭경식 거행에 관한 각국대표자 의견 보고')

바로 그달 50만원짜리 군함 양무호를 수입했다. 예포용 공포탄과 '화려한 서양물품이 완비된' 기념식용 고물딱지 배였다. 그런데 여섯 살 먹은 황태자 이은이 천연두에 걸리자 이마저 연기했다. 그해 8월 17일 대한제국 정부는 9월 26일로 다시 기념식 날짜를 공고했다.(전우용, '1902년 황제어극40년 망육순 칭경예식과 황도 정비') 러·일 사이에 불어오는 피비린내 속에, 잔치는 무산됐다. 대한제국 정부는 50만원짜리 양무호를 6년 뒤 4만2000원에 팔아버렸다.

이게 제국주의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던 그때 대한제국 집권층이 한 일이었다.

끝이 아니었다. 제물포에서 들리는 포성 속에서 황제는 또 나라를 떠날 생각을 한 것이다. 미국 공사관으로 도주하려는 ‘미관파천(美館播遷)’이다. 청일전쟁 이후 러일전쟁 때까지 고종이 시도한 파천은 아관파천을 비롯해 미관파천, 영관파천, 불관파천 4개국에 일곱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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