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와인 한 잔을 받아 향과 색, 맛과 구조감 등을 평가한다. 혀의 감각과 신경은 운동선수가 근육을 키우듯이 단련시킨다. 이렇게 40여년간 매년 2만종 와인을 시음했더니 세계 최고의 와인 평론가가 됐다. 최근 내한한 제임스 서클링이 서울 강남 한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시음하고 있다.

마신 와인의 종류만 매년 2만종. 40여년간 방문한 전 세계 와이너리 역시 2800곳을 넘는다. 그렇게 쓴 취재 노트가 이삿짐 상자로 500상자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와이너리를 찾아가고, 가장 많은 와인을 마셨다고 꼽히는 대표적 와인 평론가 중 한 명. 제임스 서클링(61) 이야기다.

그가 높은 점수를 준 와인은 가격이 두 배 이상 뛰며 매진된다. 프랑스 보르도 와인에 영향력을 끼친 로버트 파커와 비교해 제임스 서클링은 이탈리아 와인의 르네상스를 일으킨 인물로 평가된다. 그 공으로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이철형 와인나라 대표는 "'1982년산 보르도 와인이 세기의 와인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한 '보르도 테이스팅'으로 입지를 굳힌 파커와 비교해 서클링은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 와이너리를 다니며 좋은 와인을 발굴해 알린 공을 인정받는다"며 "선의의 경쟁 관계였던 파커가 올해 초 은퇴했으니 현존하는 세계 최고 평론가는 서클링"이라고 말했다.

오는 29일 한국에서 처음 개최하는 '그레이트 와인스 오브 더 월드'(서울 포시즌스호텔) 행사 준비를 위해 방한한 그를 지난달 25일 만났다. 인터뷰에는 그의 한국인 아내 마리가 함께했다. 영국 와인 수입상이었던 마리는 서클링과 결혼 후 "남편이 평론가인데 아내가 와인을 팔 수 없다"며 회사를 그만두고, 현재 서클링이 창업한 회사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노란색 노트

인터뷰는 오후 2시 서울 강남 레스토랑 '베라짜노'에서 시작됐다. 서클링은 점심을 먹고 왔다며 에스프레소 한 잔만 시켰다. 탁자 위에는 이탈리아 와인 '솔라이아 2015'가 있었다. 그가 만점을 준 와인이다.

―어떤 기준으로 점수를 주나.

"색·향·구조·인상 등의 항목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교수가 학생들에게 학점을 준다는 생각으로 점수를 준다. 80~89점은 B, 90~100점은 A다. 잔에 따른 와인은 아무런 편견 없이 그 자체에 집중한다."

―이탈리아 와인을 편애한다는 비판도 있다.

"내가 100점을 준 와인들은 프랑스 보르도 와인이 가장 많다. 평론가란 직업은 내 기준에 대한 타인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축적된 경험'과 '일관성'에서 나온다. 내가 와인 평론가를 시작한 1980년대에는 와인 평론가가 거의 없었다. 어떻게 와인을 만드는지, 세계 와인 시장이 어떻게 성장해왔는지를 그때부터 직접 경험한 사람은 많지 않다."

―경험은 어떻게 쌓았나.

"난 미 LA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1984년 프랑스 파리로 갔고, 그 이후 미국에서 거주한 적은 없다. 1987년에는 런던으로 갔고, 1998년에 이탈리아로 옮긴 후부터는 거기서 쭉 살고 있다. 26세에 처음 유럽에 왔을 때부터 캐리어 하나 끌고 유럽 모든 와인 산지를 찾아다녔다. 이동은 패스를 끊어 기차로 했다. 와이너리를 방문해 포도밭을 보고, 창고에서 자고, 가끔 문전박대도 당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그것이 내겐 와인에 대한 공부였고 비평의 기반이었다. 당시엔 와인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은 모두 노란색 노트에 담겨 있다. 그때부터 30여년간 쓴 노트는 500상자가 넘는다. 지금도 이탈리아 집 서재에 보관하고 있다."

―노트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나.

"와이너리를 방문했을 때 첫 느낌, 와인 생산자와 나눈 대화, 포도밭과 와인 창고의 현장, 와인을 마셨을 때의 느낌 등이 다 적혀 있다. 내겐 보물과 같다. 한번은 프랑스 보르도 지역에서 취재하고 파리로 돌아왔는데 숙소에 노트를 두고 온 것을 알게 됐다. 다시 비행기를 타고 숙소로 가 노트를 찾아왔다."

―아직도 노트에 쓰나?

"10년 전부터는 스마트폰에 기록하고 있다. 다시 노트로 가고 싶을 때도 있다. 내가 와인 마시는 자리에서 스마트폰에 기록하는 걸 일부 사람들은 문자 메시지를 보내거나 소셜미디어를 한다고 오해한다. 난 그렇게 예의가 없지 않다(웃음)."

"와인을 마실 때 규칙은 없어요. 커피처럼 머그잔에 담아도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 가족, 맛있는 음식과 함께 즐기며 마시는 술이 와인이에요." 제임스 서클링은 중국·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 와인에 대한 진입 장벽을 허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탈리아에 있는 집에서는 한국인 아내 마리와 계란찜, 김치 등을 와인과 즐겨 먹는다고 했다.

―콧대 높은 유럽인들이 왜 미국 출신인 당신의 평가를 인정했을까.

"난 와인을 저널리즘 관점에서 접근했다. 포도가 어디서 자랐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등에 대한 사실관계를 분석했다. 많은 와인 평론가는 무역상·사업가 등으로 시작했다. 난 평론가이기 이전에 기자였다. 또한 난 최대한 단순하면서 정확한 표현을 쓰려고도 노력했다. 예를 들어, 와인 '샤토 라피트 로칠드'의 향을 '백단유(나무 백단향에서 추출한 기름)'로 표현하는 식이다. 당시 와인 평론가들은 추상적인 표현을 즐겨 썼다."

―유럽 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언어였다. 난 당시 프랑스어를 잘 못했다. 영어를 하는 프랑스인을 찾기도 어려웠다. 바게트 하나 사는 것도 전쟁이었다. 지금은 프랑스어뿐 아니라 이탈리아어·스페인어도 익숙하다."

―40여년간 와인 마시는 걸 업(業)으로 삼고 있다.

"내게 와인을 마신다는 건 운동선수로서의 삶과 같다. 사람들은 내가 엄청난 주당인 줄 안다. 그러나 내가 와인을 마시는 건 프로의 영역이다. 혀의 감각과 정신 상태를 근육을 단련하듯 훈련해 시음에 집중한다. 가끔 대규모 시음 행사가 있을 땐 하루에 70~80종의 와인을 마신다. 몸은 굉장히 피곤하지만 내 정신은 명료하다."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나.

"와인을 한두 잔 마신다(웃음)."

―집 와인셀러에는 얼마나 많은 와인이 있나.

"5000병 정도다."

인스타그램

오후 5시. 우리는 와인바 '까사델비노'로 이동했다. 10월 말에 열리는 행사 사전 예약자들을 대상으로 파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선 와인과 간단한 안주가 제공됐다.

참석자들은 대부분 20~40대였다. 그들은 서클링에게 다가와 그가 높은 평가를 한 와인 '릿지 몬테 벨로' 등에 사인을 받고 대화하고 사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서클링도 파티 내내 그들과 대화하고 그 기록을 인스타그램에 남겼다.

―당신은 전통적인 미디어에서 소셜 미디어로 가장 잘 옮겨간 와인 평론가로도 꼽힌다.

"난 인스타그램에만 15만명이 넘는 팔로어(친구)가 있다. 웨이보 등 다른 채널까지 합하면 30만명이 넘는다. 난 61세인데, 내 인스타그램 친구들의 70% 이상은 25~44세다. 그들은 내 경험을 존중하고 내 취향과 정보를 신뢰한다. 인터넷에서 많은 정보가 쏟아지지만, 그들은 '진짜 정보'를 원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유명하니깐 팔로하는 것 아닐까.

"내가 그들에게 영감을 주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내게 '당신으로부터 많은 걸 배우고 싶다. 나중에 크면 당신처럼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럴 때 가장 큰 성취감을 느낀다."

―어릴 적 꿈은.

"기자였다. 유타대와 위스콘신대에서 정치학과 언론학을 전공했다. 위스콘신에서 지역지 기자도 했다. 수습 기간에는 경찰서에서 밤도 새웠다. 20분 만에 기사 쓰는 법도 배웠다. 고향인 LA로 돌아와 구직 활동을 했다. 취직이 잘 안 돼 법조 기자가 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로스쿨 준비도 같이 했다. 그동안 용돈 벌이 할 곳이 필요해 취직한 곳이 와인 전문지 '와인스펙테이터'다. 주급 100달러, 당시에는 구독자 800명의 작은 회사였다."

―그런데.

"로스쿨 합격 후 와인스펙테이터를 그만두려고 하니 아버지가 반대하셨다. '난 지금 열심히 변호사 해서 번 돈을 다 와인 마시는 데 쏟아붓고 있는데, 넌 지금 공짜로 좋은 와인 다 마시고 다니잖아'라고 했다. 아버지는 또 '미국에 변호사는 차고 넘치지만 와인 비평가는 두세 명밖에 없다. 넌 이미 젊은 와인 비평가로 남들보다 앞서 있는데, 왜 굳이 변호사가 되기 위해 저 끝에서부터 시작하려 하느냐'고도 했다. 순간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보통 변호사 아버지들은 아들도 변호사가 되길 원하지 않나.

"아버지는 엄청난 와인 애호가이자 수집가였다. 돈을 벌어 집에 있는 와인셀러에 와인을 채우고, 일 끝나면 집에서 와인 한잔 마시는 게 인생의 낙이셨던 분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조언이 내겐 큰 영향을 줬다."

―집안이 부유했기 때문에 내릴 수 있었던 결정 아닌가.

"부모님은 내게 돈을 한 번도 준 적이 없다. 난 당시 1주일에 100달러 받는 주급으로 살았다. 1980년대는 적은 돈으로 생활하기 크게 어렵지 않았다. 일하면서 와인은 공짜로 마실 수 있으니까(웃음)."

―와인을 처음 접한 순간을 기억하나.

"18세 대학생 때 '샤토 라피트 로칠드 1966'. LA의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아버지 친구들과 함께 마셨다. 그전까지는 테니스·서핑·스키를 좋아하는 남학생이었다. 난 그때의 와인을 정확히 기억한다. 섬세했고, 부드러웠고, 음란했다. 아버지가 친구들과 와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도 너무 멋졌다. 아버지처럼 살고 싶었다. 그 이후 종종 아버지에게 '오늘 여자친구랑 데이트 있는데 어떤 와인을 사야 해요?'라고 전화로 묻곤 했다."

한국인 가족

오후 7시 근처 고깃집으로 옮겼다. 앞서 두 자리가 있었지만, 요기가 될 만한 요리는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는 아내 마리의 오빠인 김태성 닥터뉴욕치과 원장도 함께했다. 서클링에게 한국은 '아내의 나라'다.

지난 9월 중국 만리장성에 간 와인평론가 제임스 서클링과 그의 아내 마리.

―어떻게 만났나.

"2005년 내가 이탈리아 집에서 연 와인파티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는데 당시 내겐 여자친구가 있었다. 이메일 주소를 교환했지만, 그것도 분실해 6년 정도 연락도 못 했다. 그러다 2011년 홍콩에서 열린 와인 행사에서 또 만났다. 당시 마리는 와인회사 홍콩지사장으로 발령받아 있었다. 반가웠지만 그때도 여자친구가 있어서 제대로 말도 못했다. 그리고 1년 뒤 또 홍콩에 갈 기회가 있었다. 그때 난 싱글이었다. 저녁 자리에 그녀를 초대했고, 서로 싱글이라는 걸 확인한 뒤 1년 반 정도 연애하고 결혼했다. 인연은 언젠가는 이어진다는 말이 떠올랐다."

마리 : "제임스가 한국식 혼례를 원해 서울 성북구에 있는 한국가구박물관에서 식을 했다. 2013년 12월 14일 눈이 벚꽃처럼 내리던 날이다."

―10여년 전 와인스펙테이터를 그만두고 홍콩에 '제임스서클링닷컴'이라는 회사를 차렸다.

"30여년간 와인스펙테이터는 내 삶의 전부였다. 그러나 내 회사는 아니었다. 난 당시 50대였다. 어떻게 보면 '중년의 위기'가 온 것이다. 이제 곧 환갑이 될 텐데, 누군가의 직원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내 이름으로 된 회사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됐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뭘 하고 싶었길래.

"아시아 시장을 키우고 싶었다. 당시 홍콩에 와인 붐이 일어 출장을 많이 갔다. 아시아 와인 시장의 성공 가능성을 봤고 이곳에 투자해야 한다고 대표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아시아 시장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제임스서클링닷컴을 창업하고 사무실을 홍콩에 만들었다. 청년 시절 도전을 유럽에서 했다면, 중년의 시작은 아시아인 셈이다. 지금 중국은 와인업계 5대 시장이다. 난 5년 안에 중국이 세계 1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후회한 적은.

"더 빨리 그만두지 않은 걸 후회했다. 그때 난 '좀 더 준비해서 그만둬야지'라고 생각하며 회사에 다녔다. 그런데 완벽히 준비된 순간을 누가 아느냐. 꿈꾸는 게 있다면 저지르고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후에는 승승장구?

"사실은 나온 직후부터 위기였다. 2011년 글로벌 경제 위기로 파산할 뻔도 했다. 제대로 된 사무실이 없어서 스타벅스에서 일하기도 했다. 매일 스트레스 받고 잠 못 자던 날들이었다. 회사에 소속돼 있을 때는 월급을 받지만, 사업가는 월급 줄 돈을 만들어야 한다."

―제임스서클링닷컴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나.

"와인 평론과 비평, 그리고 와인테이스팅 행사다. 행사 한 번에 800~1000명 정도 온다. 와인 생산자들과 함께하는 '록 페스티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DJ가 음악을 켜고 와인 생산자들이 와인을 따른다."

이 자리에는 이탈리아 와인 '프로두토리 델 바르바레스코'가 나왔다. 서클링이 높은 점수를 준 좋아하는 와인이다. 누군가 "파커는 몇 점을 줬지?"라고 물었다. 서클링은 웃으며 "파커는 이탈리아 와인에 점수를 주지 않아. 내가 이탈리아에 살고 있거든"이라고 농담했다.

―파커가 은퇴하기 전까지 두 사람은 와인업계 가장 유명한 경쟁자였다.

"우리는 테니스 선수처럼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 파커는 이제 은퇴했고, 난 현역이다. 이것은 큰 차이다. 지금은 와인 시장의 격동기다. 신대륙 와인이 성장하고, 아시아 시장이 커진다. 난 현역으로 이 현장의 중심에 서 있다."

―평론가로서 당신의 직업과 와인테이스팅 행사라는 사업 모델이 충돌하지는 않나.

"그렇지 않다. 와인테이스팅 행사는 내 취향을 존중하는 개인과 무역상들에게 내가 높은 점수를 준 와인을 소개하는 자리다. 이들에게 내가 평가한 와인을 맛보게 하고 왜 높은 점수를 줬는지를 이해시킨다. 행사는 수익 모델이기도 하지만 내 명성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자리다. 와이너리가 행사에 참석하려면 적어도 2년 이상 90점 넘는 점수를 받아야 한다. 예외는 없다. 이건 비용 문제가 아니다. 많은 와이너리가 행사에 참석하길 바라지만 내 기준에서 그들의 품질이 못 미치면 참가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