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2013)에서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제러미 아이언스)가 책을 읽는다. 책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어떤 곳을 떠날 때 우리는 우리의 일부를 남긴다. 떠나더라도 그곳에 머무는 것이다.’ 이 글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11시간 만에 닿은 리스본에서 내가 가져온 리스본의 일부와 아직 리스본에서 돌아오지 않은 나의 일부에 관한 이야기다.

세계사적인 도시 리스본

영화 속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의문의 여인을 찾아 리스본행 열차를 탔다. 그런데 리스본에서 발견한 것은 혁명의 그림자였다. 리스본 뒷골목에서 주인공은 여자 대신 살라자르 독재정권에 저항한 레지스탕스 흔적들을 보았다.

포르투갈 리스본 벨렝에 있는 산타마리아 성당.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속한 이 성당에 대항해시대의 주역 바스쿠 다가마가 잠들어 있다. 대항해시대의 시인 루이스 드 카몽이스 또한 잠들어 있다.

리스본에 가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색 바랜 도시 풍경과 바다를 보며 낭만을 즐기려다가, 문득 도시가 품은 세계사적인 의미를 알아채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그런 여행. 리스본은 그런 도시다.

1487년 8월 어느 날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이끄는 포르투갈 함대가 리스본을 떠났다. 1488년 1월 함대는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았다. 속칭 '대항해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미 반세기 전부터 대서양 진출을 지휘했던 엔히크 왕자는 죽고 없었다. 그 또한 리스본을 떠나 아프리카 북서쪽까지 여행을 한 탐험가였다. 그리고 1497년 7월 8일 리스본을 떠난 바스쿠 다가마 함대는 이듬해 5월 20일 악전고투 끝에 인도 남쪽 고아에 도착했다.

맨 위쪽부터 산타마리아성당 외관, 바스쿠 다가마석관, 시아두 거리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1732년 설립)과 시아두 거리 풍경. 풍경 속 동상은 16세기 포르투갈 시인 안토니우 히베이루다. 시아두 거리에 있는 광장 이름은 카몽이스 광장이다.

이들이 출항한 항구가 리스본에 있는 벨렝이다. 1493년 3월 4일 북미 서인도제도를 발견하고서 인도를 발견했다는 대착각에 빠진 콜롬버스가 유럽으로 귀환한 곳도 벨렝이었다. 이어 스페인과 네덜란드와 영국과 프랑스가 허겁지겁 바다로 갔고, 이후 오랫동안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들은 이 유럽 국가들의 폭력에 시달렸다.

그 세계사적인 사건 주인공이 유럽 서쪽 끝에 붙어 있는 소국 포르투갈이었다. 지구의 동과 서가 바다를 통해 연결되고 실질적인 세계사가 시작된 공간이 리스본이며 벨렝이라는 말이다. 이제 리스본 명물인 에그타르트를 먹고, 걸출한 한국 가수들이 버스킹을 했던 바이후 알투 언덕 전망대를 즐기기 위한 준비는 끝났다.

독재자가 세운 '발견 기념탑'

벨렝에 있는 '발견 기념탑'에는 대항해시대 주인공이 포르투갈이라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대항해시대에 활동한 인물 32명이 높이 56m짜리 석조물에 새겨져 있다. 탑을 세운 사람은 살라자르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레지스탕스들이 저항했던 그 독재자다. 탑 규모는 압도적이다. 세상 어디든, 독재자의 기념물은 거대하다. 탑 앞에 있는 물은 바다가 아니라 강이다. 테주 강이다. 거대한 강변에 또 다른 탑이 서 있다. 벨렝 탑이다. 1520년 완공된 벨렝 탑은 군사 요새 겸 세관 겸 감옥으로 사용됐다.

발견 기념탑 맨 앞에 있는 사람은 엔히크 왕자다. 그 뒤로 바스쿠 다가마,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같은 포르투갈 영웅들이 저마다 직업을 상징하는 물건을 들고 줄지어 서 있다. 서면 끝에는 일본과 중국에 선교를 했던 신부 하비에르가 무릎을 꿇고 있다. 동면 열두째에 서서 글을 적은 문서를 들고 있는 사람은 루이스 카몽이스다. 카몽이스는 군인이며 시인(詩人)이다. 포르투갈의 개척 정신을 바스쿠 다가마가 상징한다면, 카몽이스는 포르투갈 문화의 상징이다.

다가마와 카몽이스, 그리고 수도원

벨렝 바닷가에서 강변도로 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새하얀 건물이 보인다. 가까이 가면서, 심장이 뛴다. 엔히크 왕자가 세운 산타마리아 성당과 그 후계자 마누엘 왕이 세운 제로니무스 수도원이 눈부시다. 성당 남문에는 대항해시대를 기념하는 온갖 조각상과 상징이 새겨져 있다. 마누엘 왕대에 정착된 이 문양을 마누엘 양식이라고 한다. 조가비, 닻줄, 해양식물 등 바다를 모티브로 한 것들이 그중 일부다. 장담하건대, 이 문 하나만 봐도 본전은 건진 느낌이 든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남는 장사다. 원형 창문을 통해 웅장한 실내에 햇살이 들어온다. 햇살은 정교한 마누엘 양식 기둥들을 때리며 마치 영화 속처럼 형언하기 어려운 경건한 분위기를 만든다.

유럽의 서쪽 끝 호카곶. 포르투갈은 대서양으로 배를 띄움으로써 유럽 변방이라는 지리적인 단점을 기회로 전환시켰다.

신도들이 앉는 자리 뒤편 성가대 아래 양쪽으로 바스쿠 다가마와 루이스 카몽이스의 석관이 있다. 1524년 인도 코친에서 말라리아로 죽은 다가마는 15년 뒤 자기 영지인 뷔디게이라로 운구돼 안장됐다가 1880년 이 성당으로 이장됐다. 1580년 가난 속에 죽었던 시인 카몽이스 또한 같은 해 이곳으로 이장됐다.

카몽이스는 군인이었다. 인도와 마카우에서 전투에 투입돼 오른쪽 눈을 잃은 군인이었다. 그 와중에 시를 썼다. 다가마의 항해와 포르투갈 역사와 신화를 버무린 서사시를 집필했다. 메콩강에서 조난당했을 때, 떠내려가는 중국인 애인과 시집 초고(草稿) 사이에 갈등하다가 여자를 버리고 시집을 움켜쥐었다. 그래서 남은 시가 대서사시 '루시아드'다. 사랑을 버리고, 빈곤 속에 죽었으나 시는 남았다.

리스본 벨렝에 서 있는 '발견 기념탑'. 대항해시대 주역들을 기리는 거대한 구조물이다. 살라자르 독재 시대인 1940년에 가건립됐다가 20년 뒤 재건축됐다. 벨렝은 바스쿠 다가마 함대가 출항한 항구다.

아무것도 몰라도 심장이 뛸 정도로 아름다운 건물이지만, 저 성당 기둥에 새겨진 마누엘 문양의 의미와 두 석관 주인공의 정체를 알면 놀라운 역사가 보인다.

가장 오래된 서점과 시아두 거리

도심으로 돌아와 시아두 거리로 가본다. 영업 중인 전 세계 서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서점이 있다. 이름은 '베르트랑'이다. 벽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는 지진 한 번과 내전 한 번과 아홉 왕과 한 차례 역모와 대통령 열여섯 명, 세 번의 공화국, 쿠데타 여섯 번, 세계대전 두 차례와 유럽연합의 성립을 겪었다. 1732년부터 우리는 책이다.' 대항해시대 주역임을 자랑스러워함과 동시에 문학과 지성의 국가임을 자랑하는, 부정할 수 없는 자부심이 보인다. 시아두 거리에는 또 다른 16세기 시인 안토니우 히베이루 동상이 서 있고 옆에는 현대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 동상이 앉아 있다. 찬란한 벨렝 성당에는 문(文)과 무(武)의 두 영웅이 역대 왕들과 함께 묻혀 있다. 이런 도시를 본 적 있는가. 국민의 지성을 고양시킨 문인들을 세계사를 바꾼 영웅들과 동격으로 흠모하는 도시를. 여기까지가 1000년 된 도시 리스본에서 엿본 대항해시대 이야기였다. 끝이 아니다.

신트라 헤갈레이라 정원 예배당 입구, '의문의 기호'.

리스본에서 열차로 40분 거리 신트라에는 헤갈레이라 정원이 있다. 정원 속 작은 예배당 입구에서 섬찟한 눈 하나가 내려다본다. 정체불명 혹은 수수께끼. 이제 그 눈이 바라보고 있는 미스터리를 찾아 토마르(Tomar)로 간다. 〈다음 주 계속〉

〈리스본 여행법〉

1. 유레일패스: 유럽 전역 및 포르투갈 국내 여행에 미리 구입한 티켓으로 철도를 이용할 수 있다. 리스본 주변으로 가는 열차도 이용 가능. 포르투갈만으로 만족 못 하는 사람들은 마드리드-리스본 구간 야간열차를 타면 된다.

2. 리스보아 카드: 교통카드와 관광지 할인. 시내 및 근교 대중교통. 벨렝지역도 트램으로 이동 가능. 24시간용 20유로. 주요 공항과 기차역 안내소에서 판매한다.

3. 참고: 리스본은 언덕이 많아서 도보여행이 만만치 않다. 편한 신발과 물, 간편한 짐이 필수다. 교통체증이 심하므로 렌터카는 꿈꾸지 말 것.

4. 유럽의 서쪽 끝 호카곶: 난간 바깥은 강풍으로 위험하니 넘어가지 말 것.

5. 신트라: 철도로 30분. 이곳 또한 언덕이 많으니 간편하게. 첫 번째 방문하는 왕궁은 단체 가이드가 나온다.

6. 2020년 3월까지 한시적으로 아시아나항공이 리스본 직항편 운항 예정.

7. 주요 정보: 포르투갈관광청(영어), 한국사무소, 유레일 한국사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