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그룹 총수들이 최근의 경제 불확실성을 ‘최악의 위기’로 규정하고 생존전략 모색에 고심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 장기화, 일본 수출규제, 환율·유가 불안 등 대외 악재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 갈등으로 내부 불확실성까지 증폭돼 앞으로의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게 총수들의 현실 인식이다. 위기가 단기 악재에 그칠 것으로 보이지 않는 만큼 주요 그룹은 중장기적인 차원에서 미래전략을 세우고 있다.

이재용(왼쪽부터)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韓경제 전대미문의 위기"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지난 24일 경기 이천 LG인화원에서 주재한 사장단 워크숍에서 한국 경제를 불황이 천천히 지속되는 ‘L자형 경기침체’라고 진단했다. 구 회장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상의 위기에 앞으로 몇 년이 우리의 생존을 좌우하는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구광모(가운데) LG 회장이 지난달 29일 대전에 있는 LG화학 기술연구원을 방문해 연구 개발 책임자들과 차세대 OLED 시장 선도를 위한 핵심 공정 기술인 ‘솔루블 OLED’ 개발 현황을 살펴보고 있다.

앞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 19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SK의 밤’ 행사에서 특파원들과 만나 "SK 회장을 한 지도 20년 정도 되는데 20년 동안에 이런 종류의 지정학적 위기라는 건 처음 맞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최 회장은 "지정학적 리스크는 앞으로 30년은 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근 잇단 현장경영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현장을 방문할 때마다 ‘위기론’을 언급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위기와 기회는 끊임없이 반복된다" "긴장하되 두려워하지 말고 위기를 극복하자" "불확실성이 클수록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흔들림 없이 하자" 등의 메시지를 내놓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달 26일 충남 아산 삼성디스플레이 사업장에서 제품 개발 현황을 살펴보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글로벌 경영을 하는 총수들이어서 선제적인 위기 경영을 강조하는 것 같다"며 "경제 상황이 전반적으로 좋지 않은 데다 미중 무역분쟁, 환율 등 각종 해외변수가 돌출되고 있어 기업은 초긴장 상태다"라고 설명했다.

◇"글로벌 경쟁 도태될 수 있다" 미래전략 고심하는 재계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은 주요 그룹 총수 중 미래전략을 고민하며 광폭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정 수석부회장은 틈날 때마다 현대차그룹이 미래차 시장에서 기술을 선도하는 ‘게임 체인저’가 돼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3월 인도 차량공유 업체 ‘올라’에 3억달러를 투자했고 6월에는 미국 자율주행업체 ‘오로라’에 전략 투자했다. 지난 23일에는 자율주행 기술 확보를 위해 20억달러(약 2조3910억원)을 투자한다고 밝혔다. 현대차그룹이 기업에 투자한 규모로는 역대 최대다. 현대차그룹은 차량 공유 등 스마트 모빌리티 기술에 대한 투자도 꾸준히 하고 있다.

지난 26일 서울 용산구에서 개최된 제로원데이 2019에 참석한 박영선(왼쪽 앞에서 두 번째)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 정의선(왼쪽 앞에서 첫 번째)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이 함께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오는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에 133조원을 투자해 메모리 분야에 이어 세계 1위에 오르겠다는 비전을 지난 4월 제시하는 등 기술 혁신으로 승부수를 띄우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 26일 삼성디스플레이 충남 아산 사업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신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해 다가올 새로운 미래를 선도해야 한다. 기술만이 살길이다"라고 강조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최근 아산 탕정 공장에 13조원을 투자해 디스플레이 생산라인을 전환하는 방안을 막바지 검토 중이다.

LG그룹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구광모 회장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꼭 필요한 변화 중 하나"로 꼽으며 "더 나은 고객 가치를 창출하는 핵심 수단이자 경쟁력을 한 차원 끌어올리기 위해서"라고 언급했다. LG그룹은 구광모 회장 취임 이후 공격적이고 성과를 중시하는 기업문화로 바뀌고 있다. 최근에는 경쟁사를 겨냥한 소송전 등으로 과거와 달리 ‘독해졌다’는 평이 쏟아지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19일 저녁(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SK Night(SK의 밤)’ 행사에서 사회적 가치를 통한 파트너십의 확장을 주제로 인사말을 하고 있다.

SK그룹은 경제와 사회, 지정학 이슈, 기술 혁신 등을 토론하고 사회적 가치 실현 방안과 미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심포지엄 등을 열면서 근본적인 혁신을 뜻하는 ‘딥 체인지’ 논의를 활발히 벌이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그룹 전통을 이어가면서 미래성장동력을 발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