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독일 등 다른 서방 경제 대국에 비해 제조업 기반이 약했던 영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성장 동력을 잃으며 혹독한 침체기를 겪었다. 국내총생산(GDP)은 1년 만에 6% 넘게 하락했고, 5%대에 머물던 실업률이 8%를 넘어서면서 270만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제조업 경쟁력 순위는 2008년 7위에서 2013년 11위까지 밀려났다.
영국이 재기를 위해 추진한 것은 ‘제조업의 부활’이었다. 튼튼한 제조업 기반 덕분에 양질의 일자리를 계속해서 양산하면서 거뜬하게 금융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독일을 본보기로 삼았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쌓아온 지적 자산과 창의적 에너지는 넘쳐났다. 하지만 이를 산업에 적용하는 동력이 부족했다는 게 문제였다.
이 때문에 영국 정부는 당장 제조업 규모를 늘리는 방안을 택하지 않고 강점인 지식과 아이디어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안을 택했다. 연구개발(R&D) 투자를 강화하고 산업에 필요한 기술과 인력은 글로벌 기업을 유치하는 방안으로 영국식 ‘제조업 부활’에 나선 것이다. 이 같은 방식을 해상풍력 산업에도 적용하면서 영국은 해상풍력 세계 1위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 英해양지식·기술+글로벌 기업 제조력
영국 해상풍력 산업을 지탱하고 있는 기업들 중에는 다국적 기업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영국 북동부 험버 지역에 최대 해상풍력단지 혼시(Hornsea)1을 개발한 곳은 덴마크 에너지 개발사 오스테드(Orsted)다.
혼시 1에 설치된 풍력 터빈은 세계 1위 풍력 터빈 개발사인 독일의 지멘스 가메사(Simens Gamesa)가 제조했다. 영국 남부 램피온 해상풍력단지를 개발한 독일 에너지 개발사 이온(E.On)은 유럽 풍력시장의 8%를 소유한 두 번째로 큰 에너지 기업이다.
영국이 해외 기업들을 적극 유치하기로 한 계기는 해상풍력 사업을 시작할 당시 큰 프로젝트를 담당할 영국 제조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2008년 영국 정부가 대규모 해상풍력 단지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할 무렵 업계에서는 회의적인 반응이 주를 이뤘다. 제대로된 풍력 터빈 제조사도 없이 대규모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해상풍력 개발 비용의 40%는 터빈이 차지할 정도로 터빈 제조 역량은 중요하다.
그러나 영국은 당장 없는 기술력과 인력을 구하기 보단 기존의 강점인 지식과 아이디어를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척박한 북해에서 약 50년 동안 석유와 천연가스를 개발하면서 축적한 해양 관련 기술과 지식이 바탕이 됐다. 세계 해저 전문 지식의 40%의 이상을 영국이 보유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영국은 해양 지식을 토대로 전 세계 최고 해상풍력 전문기업들을 자국으로 끌어모았다. 영국의 전문 지식을 해외 기업에 공유하고 사업의 기회를 제공하는 대신 해상풍력 단지 개발 및 터빈 제조에 필요한 기술과 인력을 제공받는 것이었다. 이 기업들은 영국 현지에 공장을 세우고 현지인들을 고용해 지역 경제 부흥에도 기여했다.
영국이 택한 일종의 ‘국제 분업’ 방식은 전체 비용과 사업의 위험부담을 낮추는 장점도 있다. 브루스 클레멘츠 영국 국제통상부 자문위원은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글로벌 협업을 통해 비용을 낮추고 산업 발전도 촉진할 수 있다"며 "영국은 전문성을 공유하고 공유받는 매우 개방적인 협력 방식에 접근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 국적의 해상풍력 제조 기업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국적 기업에 비해 규모가 작을 뿐 해상풍력과 관련한 특수 부품 제작 등 기술 분야에 특화된 작고 강한 기업이 많다. 대표적으로 영국 국적의 해저 케이블 제조사 JDR케이블과 해저 케이블 보호 장치 및 시스템 제조사 테크마(Tekmar) 등이 있다.
◇ 영국 해상풍력 지식의 중심축 ‘ORE 캐터펄트’
2022까지 R&D 지출을 70억파운드(약 10.5조원)로 늘리는 정책을 발표한 영국 정부는 해상풍력 R&D에도 집중 투자하고 있다. 영국 해상풍력 R&D의 중심축엔 ORE 캐타펄트(Captapult, 이하 ORE)가 있다. ORE는 영국 해상풍력을 비롯한 해양 에너지 기술 개발 및 연구의 핵심 축을 담당하고 있는 정부 출연 연구기관이다.
영국 정부가 제조업 부활을 위해 만든 R&D 프로젝트 ‘캐타펄트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ORE는 유전자·반도체·미래도시 등 10개 캐타펄트 프로그램 중 해양 에너지를 담당한다. ORE는 정부 자금과 공공 R&D자금, 자체 수익 등으로 운영된다. 영국 정부는 지난해 발표한 해상풍력 산업 강화 정책에 따라 앞으로 5년간 7350만파운드(약 1091억원)를 ORE에 추가 지원할 예정이다.
ORE는 대학에서 진행되고 있는 해상풍력 관련 연구가 산업 현장에 곧바로 적용될 수 있도록 연구의 ‘숙성 과정’을 담당하고 있다. ORE는 이를 위해 학계와 산업계의 중간에서 각각의 수요와 공급을 파악해 서로 연결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낙뢰에 취약한 해저케이블 내구성 강화, 설치 비용 감소를 위한 기술 개발 등이 주요 연구 과제다.
ORE는 지금까지 597건의 중소기업 지원, 648건의 산업계 협업, 469건의 대학 협업의 성과를 냈다. ORE는 지난 7월에는 군산대를 방문해 해상풍력 기술교류 및 전문연구센터 설립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는 등 해외 대학과도 교류를 확대하고 있다.
ORE는 기술 연구뿐만 아니라 해상풍력 설비들이 안전하게 현장에 적용될 수 있도록 인증시험과 안전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인증시험은 기업의 의뢰를 받아 새로 제작된 터빈의 블레이드(풍력 날개)와 베어링, 해저케이블의 내구성 등 성능을 시험한다. ORE는 인증시험을 진행할 수 있는 공장과 시험장비를 보유하고 있다. 영국 해저케이블 기업 JDR케이블과는 오랜 계약을 맺고 20~150km 규모의 케이블 내구성 시험을 진행한 바 있다.
영국은 산업 안전교육을 법으로 강제하고 있다. 해상이나 고지 작업, 높은 전압을 다루는 위험한 작업을 할 땐 반드시 안전교육을 받아야 한다. ORE는 규정에 맞는 안전교육 프로그램을 개발에 기업에 제공하고 있다. 인증시험과 안전교육 프로그램은 ORE의 주요 수익 모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