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건 발생 33년 만에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이춘재(56)가 화성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에도 유력한 용의자로 추정됐던 것으로 25일 확인됐다. 경찰은 그러나 당시 과학수사 기술의 한계에 부딪혀 이춘재를 용의자로 결론 내리는 데는 실패했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 등에 따르면 경찰이 이춘재를 화성 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추정한 시기는 6차 사건이 발생한 이후다. 6차 사건은 1987년 5월 9일 오후 3시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의 한 야산에서 주부 박모(당시 29세)씨가 성폭행당하고 살해된 채 발견된 사건이다.

6차 사건 발생 이후 경찰은 탐문과 행적조사 등을 통해 이춘재가 용의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그를 불러 조사했다. 경찰은 이춘재에 대한 주민 진술 등 첩보를 통해 그가 의심된다고 보고 지휘부에 "유력한 용의자로 보이는 인물이 있다"고 보고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7차 사건 당시 용의자 몽타주 수배전단.

그러나 며칠 후 이춘재는 수사 선상에서 제외됐다. 당시 과학수사 기술로는 6차 사건 현장에서 확보한 체액 등 증거물이 이춘재의 것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증거물에서 DNA를 검출해 분석하는 기술이 도입되기 이전이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이 기술을 1991년 8월 수사에 처음 도입했다. 마지막 10차 사건이 발생한 지 4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또 6차 이전 사건에서 확보한 증거물 등을 통해 경찰이 추정한 용의자의 혈액형은 B형이었던 것과 달리 이춘재의 혈액형은 O형이었던 점도 영향을 미쳤다. DNA 분석 기술 도입 이전까지는 혈흔을 분석해 혈액형을 파악하는 정도의 기술만이 수사에 활용됐기 때문이다. 족적(발자국)도 그의 것과 달랐다고 한다.

당시 경찰이 이춘재를 강도 높게 조사한 탓인지 6차 사건 이후 화성 일대 유사 범죄는 한동안 잦아들었다. 1차 사건부터 6차 사건까지는 짧게는 이틀(3·4차 사이), 길게는 4개월(5·6차 사이)의 짧은 시간을 두고 범행이 이뤄졌다. 그러나 7차 사건은 6차 사건 이후 약 1년 4개월 만에 발생했다.

2011년 한국경찰학회보에 ‘연쇄살인사건에 있어서 범인상 추정에 관한 연구’ 논문 등을 등재하며 이 사건을 연구해 온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그 즈음 ‘화성 연쇄살인’이라는 제하의 언론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고, 경찰의 수사도 대폭 강화하자 범인이 경계심을 갖고 심리적 냉각기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조선DB

경찰은 이후 8차 사건과 10차 사건이 일어난 뒤에도 2차례 더 이춘재를 불러 조사했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그는 화성 10차 사건(1991년 4월) 이후 2년 9개월이 지난 1994년 1월 충북 청주에서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검거됐다.

앞서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사건 피해자의 유류품에 대한 DNA 감정 의뢰해 5, 7, 9차 사건에서 검출된 용의자의 DNA가 이춘재의 것과 일치하다는 결과를 통보 받았다. 경찰은 이외 나머지 화성 사건의 추가 증거품도 순차적으로 보내 DNA를 대조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