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9차 '화성 사건' 증거물 DNA와 '이춘재 DNA' 일치
DNA 분석 기술 빠르게 발전…범죄자 DNA 저장 'DNA법'도 역할
"스치기만 해도 남는 게 DNA…미제사건 해결사례 늘 것"

경찰이 대표적인 장기(長期) 미제 사건으로 꼽히는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1994년 ‘청주 처제 성폭행·살인범’ 이춘재(56)를 특정했다. 첫 사건이 발생한 지 33년만이다. 경찰은 단서가 밝혀지게 된 ‘결정적 열쇠’로 최근 급속도로 발달한 ‘유전자(DNA) 분석 기술’을 꼽았다.

20일 경찰에 따르면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중요미제사건전담수사팀은 지난 7월 15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화성 사건으로 희생된 여성 10명 중 1990년 11월 숨진 9번째 피해자 김모(당시 14세)양의 거들을 보내 분석을 의뢰했다. 그 결과 거들에서 이춘재의 DNA가 검출됐다.

이에 따라 경찰은 7번째(1988년 9월 발생) 피해자 안모(당시 52세)씨와 5번째(1987년 1월) 피해자 홍모(당시 19세)양의 사건 증거물도 추가로 감정을 의뢰했고, 동일한 이춘재의 DNA가 발견됐다. 경찰은 아직 보관 중이던 증거물을 국과수에 다 보내지 못한 상태다. 아직 분석을 의뢰하지 못한, 증거물을 재분석할 경우, 이춘재의 범행이 추가로 확인될 가능성도 남아있다.

7차 사건 당시 용의자 몽타주 수배전단.

◇"스치기만 해도 DNA는 남는다"…DNA 분석 기술, 빠르게 발전
DNA는 사람을 특정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로 평가받는다. 모든 사람의 DNA가 서로 다르고, 죽는 날까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혈액형, 성별, 친자 관계 등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유전 정보를 DNA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인체를 구성하는 모든 세포에는 DNA가 존재해 머리카락, 침, 소량의 혈흔 등 신체 일부 어디에서든지 DNA를 검출할 수 있다.

또 DNA 분석은 현장에서 채취된 극히 적은 양의 시료에서도 검출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현재 국과수는 1ng(나노그램10억분의 ·1g)의 DNA만 있어도 증폭 과정을 통해 분석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러한 점때문에 경찰들 사이에서는 "스치기만 해도 DNA는 남는다"는 말도 있다.

유전자분석 방법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ABO식 혈액형 분석으로 개인을 식별하거나 신원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같은 형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 용의자를 특정할 확률이 낮았고, 많은 양의 시료가 필요했다. 또 부패되거나 오염된 시료에서는 분석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DNA 분석실.

서중석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은 "국내 DNA 분석기술, 장비, 연구원들의 노하우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이번 화성 연쇄 살인사건은 DNA 분석기술과 범죄자 DNA를 데이터베이스(DB) 해둔 ‘DNA법’, 경찰의 증거품 보존 시스템과 끈질긴 추적으로 탄생한 성과"라고 했다.

◇ ‘기본권’ 논란 일었던 ‘DNA법’도 숨은 공신

DNA 분석만 한다고 해서,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분석된 DNA와 대조해 같은 DNA를 가진 사람을 찾을 수 있는 ‘표본’이 중요하다. 보통 범죄현장에서 채취한 DNA와 수사를 통해 체포된 용의자의 머리카락이나 침 등에서 추출한 DNA와 대조해, 동일인임을 확인한다.

정부는 조두순 사건 등 강력 범죄가 잇따르자 2010년 1월 DNA법을 제정, 그해 7월부터 시행했다. 이 법 5조는 살인과 강도, 강간, 폭력 등 11개 강력범죄를 저지를 경우 DNA 감식시료를 채취할 수 있도록 했다. 대상자가 동의하는 경우에는 영장 없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영장을 발부받아 시료를 채취하고 해당 정보는 데이터베이스(DB)에 저장해, 검색이 가능하도록 했다. 하지만 2014년 인간의 기본권 위배 등을 이유로 수감자들의 DNA를 저장하는 DB 문제가 대법원에서 논의됐지만, 합헌 결정이 내려졌다.

1993년 7월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가 화성군 정남면 관항리 인근 농수로에서 유류품을 찾고 있는 모습.

익명을 요구한 경찰 출신 한 변호사는 "강도의 재범률은 60%가 넘고, 강간범죄의 재범률도 50%가 넘는다, 결국 강력범죄를 저질렀던 사람들 가운데 또다시 같은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다"며 "강력범죄 이력이 있는 대상의 DNA정보수집은 신속한 범인검거에 큰 효과가 있고, 무고한 제2, 제3의 피해자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장기 미제사건 수사 활기…수년전 사건 '검거' 잇따라
최근 DNA 분석 기법이 발달하면서, 국내에서도 장기 미제 사건의 재수사도 활기를 띄고 있다. 2016년에는 '노원구 부녀자 강간살인 사건'의 범인이 18년만에 붙잡혔다. 1998년 10월 27일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에서 한 여성이 성폭행 당한 뒤 목 졸려 숨진 일이 있었다. 경찰은 피해자의 몸에 남아 있던 정액을 확보해 국과수에 보관해 왔다. 당시 기술로는 범인의 혈액형이 AB형이란 사실은 알아냈지만, 더이상의 수사 진척은 없었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팀의 막내였던 김응희 경감이 내내 이 사건을 잊지 못하다가 2016년 재수사에 착수했다. DNA DB가 구축돼 범인을 특정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DNA 재분석 결과 같은 정액에서도 과거보다 용의자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혈액형 등 종합적인 단서들을 토대로 피의자 오모(47)씨를 특정했다.

체액이 묻은 마스크가 단초가 돼 7년 전 강도를 붙잡은 일도 있다. 2011년 4월 경기도 의정부에서는 한 남성이 택시 요금을 받으려고 하는 택시 기사를 마구 폭행해 달아 난 뒤, 길 가던 여성의 가방을 훔치고 배를 걷어차는 일이 발생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현장에서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마스크를 발견해 유전자를 채취했으나 당시에는 범인 특정에 실패했다. 그로부터 7년이 흐른 지난해 법무부가 구속자의 DNA를 미제사건에서 확보한 DNA와 비교·대조하는 작업을 하던 중 과거 다른 범죄로 구속된 적 있는 20대 남성의 것과 같다는 결과를 확보해 범인을 특정했다.

경찰 관계자는 "DNA분석은 사건 현장에서 범인이 흘린 여러 인체 유래의 증거물을 분석해 범인을 특정할 있어 범인의 검거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며 "DNA를 분석하는 기술이 매년 정교하게 발전하고 있어, 수십년 된 장기 미제사건을 밝히는 사례는 더 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