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 성폭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55) 전 충남지사의 재판은 ‘롤러코스터’였다. 1심과 2심의 판단이 무죄와 ‘대부분’ 유죄로 엇갈렸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2심 판결이 옳다고 보고 안 전 지사에 대해 유죄를 확정했다. 피해자인 김지은씨의 진술에 일관성이 있다고 판단했고, ‘성인지(性認知) 감수성’을 고려했다. ‘성인지 감수성’은 성범죄 피해자가 처한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 피해자 진술이 일부 부정확하더라도 함부로 배척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지난해 4월에도 학생을 성희롱해 해임된 대학 교수를 복직시키라고 판단한 2심을 깨고 파기환송 판결을 내렸다. 당시 대법원은 하급심 판단에 성인지 감수성이 결여됐고, 피해자의 2차 피해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때부터 성인지 감수성이 성범죄 사건의 새 판단 기준으로 떠올랐다.
안 전 지사는 2017년 7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스위스·러시아 등 외국 출장지와 서울 등에서 수행비서였던 김지은씨를 4차례에 걸쳐 성폭행하고 6차례에 걸쳐 추행한 혐의를 받았다. 1심과 2심의 판단은 엇갈렸다. 1심은 모든 혐의를 무죄로 봤지만, 2심은 10개 혐의 가운데 9개를 유죄로 인정했다.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는 9일 안 전 지사에게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물적 증거' 없는 性범죄…대법 "진술 신빙성 함부로 배척해선 안 돼"
'물적 증거'가 잘 남지 않는 성범죄 관련 사건에서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놓고 주로 다투게 된다. 이 때문에 안 전 지사의 재판을 놓고 핵심 쟁점은 진술의 신빙성, 특히 김씨의 진술을 믿을 수 있는지였다. 1심은 김씨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2017년 7월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성폭력 피해를 입고도 안 전 지사가 좋아할 만한 식당을 찾고, 와인바를 함께 갔다는 이유였다. 안 전 지사가 이용하던 미용실에서 머리를 손질한 것도 근거가 됐다. "김씨가 피해를 당한 이후 도저히 피해자라고 볼 수 없는 행동을 했다"는 안 전 지사 측의 변론을 받아들인 것이다.
반면 2심은 이를 뒤집었다. 김씨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2심 재판부는 "김씨의 진술에 비합리적이고 모순되는 부분이 없다"며 "김씨가 자신에게 다소 불리한 부분도 솔직하게 진술했고, 자신이 대응한 방법도 과장해 진술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실 관계와 일부 맞지 않는 경우가 있었지만, 재판부는 "그 자체로 신빙성을 배척할 사정이라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반면 상대방인 안 전 지사의 진술을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2심 재판부는 "안 전 지사는 김씨와 성관계를 맺은 경위에 대한 진술을 계속 번복하고 있다"며 "안 전 지사의 진술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했다. 안 전 지사는 김씨의 폭로 직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모두 제 잘못이고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 입장은 틀렸다"고 했지만, 이후 검찰 조사에서는 "불륜과 간음에 대한 사과"라고 했다. 항소심 재판 과정에서도 김씨와의 관계에 대해 명확하게 진술하지 못했다.
대법원은 2심 판단이 옳다고 봤다. 대법원은 "피해자 등의 진술은 주요한 부분이 일관되며, 경험칙에 비춰 모순되는 부분이 없고, 허위로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할 만한 동기가 드러나지 않는 이상 진술의 신빙성을 특별한 이유 없이 함부로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 피해자 입장에서 본 '성인지 감수성'…"피해자 특별한 사정 고려해야"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해석도 1심과 2심이 달랐다. 성인지 감수성은 피해자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범죄 사건 발생 후 피해자가 가해자와 가깝게 지내는 등 일반적인 피해자의 모습이라고 보기 어려운 행위가 발견된다고 해도 성범죄 피해자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피해자의 진술을 쉽게 배척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1심은 이에 대해 "여성은 독자적인 인격체로서 자기 책임 아래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음이 당연하다"며 "이런 능력 자체를 부인하는 해석은 여성의 존엄과 가치에 반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은 정상적 판단능력을 갖춘 성인 남녀 사이에 발생한 사건이고, 피해자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곤란하게 하는 물리적인 위력이 직접 행사됐다고 볼 만한 구체적 증거는 제출되지 않은 사안"이라고 했다. 안 전 지사의 위력(威力)은 상대적으로 비중을 낮추고, 김씨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부각한 것이다.
반면 2심은 피해자가 위력을 뿌리치지 못하고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한다면, 이를 뒤집을 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경우 피해자 입장에서 그 주장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봤다. 2심 재판부는 "수행비서로서 업무를 성실히 수행한 모습이 실제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의 모습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피해자의 성격이나 구체적 상황에 따라 대처는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고, 안 전 지사 측의 주장은 '정형화된 피해자'라는 편협한 관점에 기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급심 모두 성인지 감수성과 관련해 대법원의 확립된 판례를 이용했다. 다만 김씨 진술을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이 엇갈리면서 결론도 달라졌다. 대법원은 "성폭행 등의 피해자가 처해있는 특별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른 증거 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