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독재 정권 치하에서 막 벗어난 루마니아는 가난했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한 니쿠 안드레스쿠는 아내 마리아와 가방 두 개를 들고 캐나다 토론토로 떠났다. 니쿠는 자동차 설계 회사, 경제학을 전공한 마리아는 투자 회사에 취직했다. 2000년 딸 비앙카가 태어났다.
2019년. 부부는 8일(한국 시각) 미국 뉴욕에서 열린 US오픈 여자 단식 결승전에 왔다. 네트 앞엔 딸이 있었다. 비앙카 안드레스쿠(19·캐나다·세계 15위)는 '여제' 세리나 윌리엄스(38·미국·8위)를 1시간 40분 만에 세트스코어 2대0(6-3 7-5)으로 완파하고 우승컵을 들었다. 부부는 고등학교 졸업식에 온 것처럼 경기 내내 빙그레 웃고만 있다가 우승을 확정한 딸이 관중석으로 달려오자 꼭 안아줬다. "비앙카가 일곱 살에 테니스 시작한 이후로 줄곧 US오픈 결승전에서 세리나 윌리엄스를 꺾고 우승하는 상상을 하며 훈련해왔어요. 그 꿈을 이뤄내 대견합니다."
◇밀레니엄 세대 최초 챔피언
안드레스쿠는 이날 우승으로 숱한 최초 기록을 수립했다. 그는 캐나다인 최초이자 2000년생 최초로 그랜드슬램 대회 챔피언이다. 로저 페더러·라파엘 나달·노바크 조코비치 3인방이 장기 군림하는 남자 테니스에선 밀레니엄 세대는커녕 1990년대생조차 그랜드슬램 챔피언이 없다. 안드레스쿠는 올해 US오픈에 처음 나와 단박에 우승까지 하는 최초 기록도 수립했다. 작년 가을엔 US오픈 예선 1라운드에서 떨어져 TV로 경기를 봤고, 세계 랭킹은 243위였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 2만4000여명은 24번째 그랜드슬램 우승컵에 도전하는 윌리엄스를 일방적으로 응원했다. 그럴수록 열아홉 살 안드레스쿠는 더 빠르고 정확한 샷을 날렸다. 좀처럼 땀을 안 흘리는 윌리엄스가 이날은 얼굴부터 치마 끝까지 땀 범벅이 돼 뛰어다녔지만 역부족이었다. 여제는 2세트에서 1―5로 밀렸다가 5―5까지 따라잡는 저력을 보인 것으로 체면을 세웠다. 챔피언 포인트를 따내고 코트에 벌러덩 누워 기쁨을 만끽하던 안드레스쿠는 "모두가 세리나를 응원했는데 내가 이겨 미안하다"면서 "응원이 너무 시끄러워서 집중하기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게 이 대회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고 여유롭게 우승 소감을 말했다.
◇강심장을 가진 천재 소녀
안드레스쿠는 강자에게 강하다. 올해 윌리엄스 자매를 비롯해 캐롤라인 워즈니아키, 안젤리크 케르버 등 톱랭커들을 줄줄이 꺾으며 152위로 시작한 세계 랭킹을 5위까지 끌어올렸다. 시즌 성적표는 45승4패이고, 세계 10위 이내 선수들과 맞대결만 따지면 8전8승이다. 3월 인디언웰스 오픈에서 와일드카드로 나와 우승해 파란을 일으키더니, 어깨 회전근 부상으로 잠시 쉬고 더 강해졌다. 지난달 캐나다 로저스컵에서 우승했고 이번엔 US오픈 트로피까지 차지했다.
이 기세는 어디서 나왔을까. 그는 작년까지만 해도 이름 있는 선수들과 붙어본 경험이 전무했다. 자녀의 운동으로 집안을 일으키려는 여느 이민자 가정과 다르게 안드레스쿠 집안은 딸에게 운동보다 공부를 더 강조했다. 부모는 딸이 열 살에 캐나다 테니스협회에 발탁돼 엘리트 훈련을 받느라 학교 갈 시간이 없자 온라인 숙제와 시험을 꼼꼼히 챙겼다. 안드레스쿠는 작년까지 공부와 운동을 병행했고, 올해부터 테니스에 전념한다. 실뱅 브루노 코치는 "비앙카는 힘 세고 코트 커버력이 좋은 데다 정신력까지 최고"라며 "누구를 만나든 기죽지 않고 공격적으로 몰아붙인다. 악바리 근성과 담대함을 타고났다"고 치켜세웠다.
"최대한 많이 우승하고 세계 랭킹 1위가 되는 것이 앞으로의 목표입니다." 윌리엄스가 20년 전 메이저 첫 우승을 장식했던 경기장에서 역사적인 데뷔를 한 10대 소녀의 포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