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지대를 벗어나 저와 함께 과감한 도전을 하기로 결심한 워너브러더스와 DC코믹스에 감사를 표합니다." 미국 감독 토드 필립스(49)의 말이 끝나자 7일(현지 시각) 이탈리아 베네치아 리도섬의 살라 그란데 극장엔 뜨거운 환호가 물결쳤다. 필립스 감독은 곁에 선 배우 호아킨 피닉스(45)를 가리키기도 했다. "당신은 내가 아는 가장 사납고 명민하며 열려 있는 사자다!" 피닉스의 눈가가 붉어졌고, 감독과 배우는 포옹했다.

황금사자상을 받은 ‘조커’의 한 장면. ‘배트맨’ 시리즈의 악당으로 등장하는 조커가 어떻게 일그러진 존재가 됐는지를 따라간다. 조커로 분한 호아킨 피닉스의 광기 번득이는 연기가 압권.

올해 금빛 사자는 '파격'과 '대중성'을 향해 포효했다. 7일(현지 시각) 폐막한 제76회 베네치아 영화제의 황금사자상(최고 작품상)은 워너브러더스·DC코믹스가 제작한 영화 '조커'에 돌아갔다. '배트맨' 시리즈의 악당 조커(호아킨 피닉스)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그린 작품. 사회가 외면한 개인이 어떻게 일그러지는가 비추는 범죄 스릴러로, 피닉스의 광기 어린 연기가 감탄을 자아낸다.

수퍼히어로 만화를 원작으로 한 블록버스터급 영화가 3대 영화제에서 최고 작품상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달 31일 첫 상영 때 8분의 기립 박수를 받았고, '할리우드 리포터' '버라이어티' 같은 해외 매체와 '일 지오날레' '라 레푸블리카' 등 이탈리아 현지 매체로부터 고른 찬사를 들었지만, "아카데미상에 더 어울린다" "호아킨 피닉스의 남우주연상 정도만 받지 않겠느냐"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감독 토드 필립스(위)와 여우주연상 수상작 ‘글로리아 먼디’.

베네치아의 선택은 그러나 과감했다. 작년 넷플릭스 영화 '로마'(감독 알폰소 쿠아론)에 황금사자상을 줬던 것에 이어 또 한 번의 파격을 택한 것. 프랑스 칸 영화제는 넷플릭스 영화를 거부한다. 베네치아 영화제는 베를린·칸보다 오래된 세계 최초의 국제 영화제다. "가장 안정적"이라는 평을 들어왔다. 칸이 정치적인 작품을, 베를린이 실험적인 영화를 선호해왔다면, 베네치아는 미적이고 유려한 영화에 마음을 여는 편이다. 상업 영화에도 한결 관대했다. 최근엔 유연한 변신까지 꾀하는 중이다. 리도섬이라는 외딴 지역에서 열려 갈수록 관객 유치가 쉽지 않은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비록 수상엔 실패했지만, 올해 넷플릭스 영화 두 편도 또다시 경쟁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결혼 이야기'(감독 노아 바움백), '시크릿 세탁소'(감독 스티븐 소더버그) 등이다. 티모시 샬라메의 '더 킹: 헨리 5세'(감독 데이비드 미코브)도 비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젊어지려는 베네치아의 노력에 관객도 열렬히 화답했다. 지난 3일 '더 킹' 상영 때 화면에 넷플릭스 로고가 뜨자 관객들은 크게 환호했다. 칸이나 베를린 영화제 관객들이 넷플릭스 로고를 보며 야유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톱 스타가 유독 많이 찾은 해이기도 했다. 메릴 스트리프, 카트린 드뇌브, 쥘리에트 비노슈, 스칼릿 조핸슨, 궁리, 브래드 피트, 조니 뎁 같은 쟁쟁한 배우부터 크리스틴 스튜어트, 티모시 샬라메, 로버트 패틴슨, 데인 더한처럼 10~20대의 지지를 받는 '핫한' 이들이 대거 찾아왔고, 팬들은 이때마다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파격을 꾀하되 균형을 지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커'에게 최고상을 줬지만 다른 수상작은 전통의 영화제다운 예술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남우주연상은 '레인보 나의 사랑'으로 국내에도 알려진 이탈리아 배우 루카 마리넬리(영화 '마르틴 에덴')가, 여우주연상은 프랑스 배우 아리안 아스카리드(영화 '글로리아 먼디')가 받았다. 감독상은 2014년 황금사자상을 받았던 스웨덴 감독 로이 안데르손의 '어바웃 엔들리스니스'에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