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 '제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저자

어느 도서관에서 독자와의 만남을 가졌다. 내 또래 여성들이 대부분 자리를 채웠으나 엄마뻘 어르신도 몇 분 오셨다. 도대체 요즘 것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궁금하셨나 보다. 한 아주머니가 손을 들고 질문하셨다. "육십대 엄마에게 딸로서 해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궁금하네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나는 "음~" 소리를 세 번쯤 거듭한 끝에 머릿속 깊숙이 잠들어 있던 옛일을 떠올리게 되었다.

몇 해 전, 엄마가 산에서 실족했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면서 정신을 잃었는데 하필이면 산비탈 쪽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단다. 목숨은 건졌으나 네 차례에 걸친 봉합 수술을 받을 만큼 얼굴을 많이 다쳤다. 이집트 미라처럼 온 얼굴에 붕대를 감은 엄마는 눈만 껌뻑껌뻑할 뿐 입을 열지는 못했다. 사고 충격에 몸이 성치 않은 탓이었다. "잔소리라도 좋으니까 얘기 좀 해 봐."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답 없는 엄마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엄마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며 가까이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기쁨에 겨운 내가 엄마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대자 다 갈라진 엄마의 목소리가 자그마하게 들려왔다. "나 뒈졌으면 딴× 좋은 일 시킬 뻔했어." 난 병실이 떠나가라 웃었다. 없는 살림에 자식들 키우느라 평생을 고생하고 이제야 좀 살 만해졌는데, 다른 여자가 이 자리를 꿰차고 들어앉아 당신이 할 호강을 대신할 뻔했다는 말이었다.

이 이야기를 전하며 나는 말했다. "저희 엄마는 사윗감을 구해오라는 둥, 책 팔아 떼돈 벌어 해외여행을 보내 달라는 둥 저한테 바라는 게 무지 많으시지만요. 제가 엄마한테 해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 딱 하나예요. '딴 아줌마' 좋은 일 시키지 말고 만수무강하시라고요. 아빠가 벌어 놓은 돈 야금야금 뺏어 쓰면서요." 사람들이 와하하 웃었다. 어째 부모와 자식이 바뀐 것 같지만 아무렴 어떠랴. 엄마, 다른 건 다 필요 없으니 건강하게만 살아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