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세 부국장 겸 여론독자부장

지난 30년간 세계경제의 메가트렌드였던 세계화가 퇴조하면서 곳곳에서 파열음이 나고 있다. 글로벌 공급 사슬 속에서 이익을 공유하는 기업이 있는 한 분쟁을 피할 수 있다는 '글로벌 시대 평화법칙'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지정학적 안보 논리와 정치 이익을 앞세운 자국 우선주의 위세에 눌려 기업들의 이익은 뒷전으로 밀리고 무역 전쟁 최전선의 총알받이로 내몰리고 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예찬했던 글로벌화로 '평평해진 세계'는 다시 울퉁불퉁해지고 있다. 미·중 간의 무역 분쟁, 영국의 브렉시트로 이어지는 이런 반(反)세계화 흐름 속에 한·일 간 경제 분쟁도 있다.

평평한 세계에 파고든 보호무역은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경제 전쟁 양상을 불러왔다. 과거의 보호무역은 각국이 관세와 비관세 장벽을 발동해 국내 시장의 접근을 막고, 경쟁적인 평가절하를 통해 확보한 수출 경쟁력으로 상대방의 빵을 뺏어오는 제로섬 게임이었다. '포스트 글로벌화(post-globalization)'시대의 신보호무역은 자국 시장의 접근을 막는 수요 제한 조치를 넘어 글로벌 공급 사슬의 결정적인 길목을 틀어쥐고 전체 글로벌 시장에 대한 제품 공급을 차단하는 새로운 형태의 무기를 동원하고 있다. 미국이 국가 통신 안보를 이유로 중국 화웨이에 대한 미국 퀄컴사의 통신 칩과 구글의 안드로이드 운영 체계 공급을 중단하고, 이란 제재를 위해 달러에 기반한 국제 결제 시스템에서 이란은행을 배제한 것은 모두 글로벌화된 세계의 공급 네트워크에 대한 공격이다. 일본이 관세 장벽 등을 이용해 한국 제품의 수입을 막는 대신 삼성에 들어가는 불화수소 등 필수 소재 및 부품의 차단을 노린 것도 역시 글로벌 공급 네트워크에 타격을 주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미국 조지워싱턴대 헨리 패럴 교수와 조지타운대 에이브러햄 뉴먼 교수는 이를 '상호 의존성의 무기화(weaponized interdependence)'라고 부른다. 서로 의존하는 글로벌 경제이지만, 비대칭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네트워크 허브를 차지하고 있는 국가가 이를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한국과 일본이 서로를 화이트리스트(수출 심사 우대국)에서 배제하며 본격적인 공방을 벌일 경우 더 결정적인 기술 네트워크의 길목을 차지하고 있는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가 상대적으로 불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글로벌 시대의 보호무역 조치는 서로 얽혀 있고 대체 네트워크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선공(先攻)한 국가가 의도치 않은 상황에 맞닥뜨릴 수 있다. 미국의 일방적인 이란 제재 조치에 대항해 영국·독일·프랑스는 달러를 대체하는 '인스텍스'라는 새로운 결제 시스템을 개발해 이용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일본 역시 만약 삼성이 금수(禁輸)가 우려되는 소재를 유럽 등 다른 네트워크를 통해서 확보하거나 국산화를 통해 조달할 경우 제재의 효과가 무력화되고, 일본 기업은 중요한 고객만 잃어버리는 결과를 맞을 수도 있다.

일본의 경제 보복은 의도치 않게 '포스트 글로벌화' 시대의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주었다. 피아(彼我)가 뒤섞여 있는 이 시대엔 언제든 누구와도 '신(新)냉전'이 벌어질 수 있다. 이번엔 일본이 도발했지만, 지정학적인 안보 상황 등을 고려하면 중국과 부딪칠 개연성도 매우 높다. 이미 사드 사태에서 경험했지만 희토류 등 핵심 자원을 무기로 우리의 공급 네트워크를 공격해올 가능성은 상존한다. 초격차의 기술 확보, 핵심 소재·부품의 전략적 국산화와 대체 네트워크 마련은 극일(克日)을 넘어서는 시급한 국가 과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