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문학 동호인들 틈에 끼여 일주일 남짓 중국 절강성과 안휘성 지역을 답사했다. 매일같이 수은주는 40도를 가리킨다. 더위를 피하려면 차라리 더위 속으로 들어가라는 동산양개(洞山良价·807~869) 선사의 말씀을 온몸으로 실천한 나들이였다. 쉴 때마다 뜨거운 녹차를 돌린다. 많은 땀을 흘린 뒤라 큰 컵으로 양껏 마시고 나면 의외로 시원하다. 이열치열(以熱治熱) 처방이다.

안휘성 선성(宣城) 경현(涇縣)에 있는 도화담(桃花潭)과 회선각(懷仙閣)의 여운이 작지 않았다. 시인 이태백(李太白·701~762)과 시골 선비 왕륜(汪倫)이 헤어질 때 남긴 명시 한 편 속의 우정이 1500년 동안 많은 사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문학의 고장인 까닭이다.

강남 지방을 유람하던 이태백이 인근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왕륜은 별로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자기 동네로 이태백을 초청하려는 마음을 냈다. 길이가 십 리가량 되는 도화담을 '십리도화(十里桃花·십 리에 걸쳐 핀 복숭아꽃)'로 바꾸고 만씨가 운영하는 초라한 1인 주점을 '만가주점(萬家酒店·만 가구나 되는 술집)'이라 표현한 문자 둔갑술을 사용했다. 풍류와 술을 좋아하는 시선(詩仙)을 유인하는 데 성공한 것은 평소에 그의 시를 흠모한 왕륜 나름의 지혜였다.

도화담에서 멀지 않은 향리에 있던 왕륜의 무덤도 1958년 회선각 부근으로 이장했다. 수력발전소 건립 정책에 밀린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한다. 1983년 이러한 과정을 기록한 새로운 중건비를 곁에 추가로 세웠다. 원래의 묘비에는 서두에 '적선(謫仙)이 제(題·쓰다)하다'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태백이 썼다는 뜻일 게다. 적선자(謫仙子·유배당한 신선)는 태백의 도가풍 이름이다. 왕륜의 관직은 사관(史官·역사를 기록하는 관리)이라고 돼 있다. 태백을 만난 이듬해 왕륜은 사망했고 조문을 위해 또 태백이 다녀갔다. 움직임 자체가 역사가 되는 유명 인사가 두 번씩이나 찾은 것이다. 왕륜의 존재 자체가 인문학 역사를 새로 만들었으니 사관이란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것도 아니다.

묘소는 석재를 둘렀지만 봉분 위에는 갖가지 풀과 함께 작은 나무가 제멋대로 자랐다. 관광지에 수없는 사람이 드나들지만 이런 봉두난발조차 별로 개의치 않는 그들의 무심함은 또 다른 문화 상품이다. 옆으로 난 경사로를 따라 잠깐 올라가니 왕륜 사당이 있다. 나무로 만든 흉상 뒤로 그의 자연스러운 옆모습을 그린 전신상을 걸어놓았다. 입구를 90도 달리하여 회선각을 바라보며 이태백 사당을 연이어 붙였다. 청련사(靑蓮祠)다. 불가에서는 그를 청련거사(靑蓮居士)로 부른다. 역시 나무 흉상 뒤에 두 사람이 함께 신선처럼 노니는 그림을 족자처럼 드리웠다. 같은 건물에서 칸을 나누고 입구를 달리한 두 사당을 보니 1500년 전 우정을 잊지 않으려는 후학들의 마음 씀씀이가 더욱 돋보인다.

우애가 매우 깊음을 의미하는 정심담수(情深潭水·정이 도화담의 물보다 깊다) 현장에서 일행과 함께 읽은 '증왕륜(贈汪倫·태백이 왕륜에게 준 시)'은 더욱 명품이 되어 가슴에 울림을 더해준다.

도화담수심천척(桃花潭水深千尺·도화담 물이 천 척으로 깊어도)

불급왕륜송아정(不及汪倫送我情·왕륜이 나[태백]를 보내는 정에는 못 미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