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성 베이징특파원

8일 자정을 갓 넘긴 시각. 베이징 둥즈먼네이다제(東直門內大街) 식당가인 구이제(簋街·사진)의 한 식당 앞은 100여명 대기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초등학교 4학년 아들과 함께 온 네(聶)씨 부부도 그들 속에 있었다. 세 식구의 번호표를 보니 발급 시각이 오후 10시 6분. 네씨의 아내는 지친 기색도 없이 "구이제는 지금이 초저녁"이라고 말했다.

중국 외교부에서 멀지 않은 구이제는 '베이징 시민의 심야식당'으로 불린다. 동서 1480m, 왕복 6차로 양편으로 식당 150곳이 몰려 있는 베이징 최대의 미식 거리이자, 베이징에서 24시간 식당이 처음으로 등장한 곳이다. 붉은 홍등 불빛이 넘실대는 거리는 매일 새벽 1시에 인파가 절정을 이룬다. 유명한 가게들은 심야에도 한두 시간 대기는 기본이다.

이 '불야(不夜)의 식당가'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건 '매운맛'이다. 70~80%의 식당이 시뻘건 마라(麻辣·얼얼하게 매운맛) 소스로 샤오룽샤(小龍蝦·민물가재)를 볶아낸 마라룽샤를 판다. 한 가게의 호객꾼 웨징페이(岳京飛·21)씨는 "구이제를 찾는 손님들의 입맛은 한마디로 '부라부환(不辣不歡·매워야 좋다)'"이라고 말했다. 그는 "경제가 발전하면 스트레스가 늘어나는 법"이라며 "그 스트레스를 화끈한 매운맛으로 날려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30여년 전 이 거리엔 식당이라곤 없었다. 변모가 시작된 것은 덩샤오핑식 개혁·개방이 닻을 올린 지 6년 만인 1984년이었다. "야간 활동 인구는 느는데 식당들이 너무 일찍 문을 닫는다"는 불만이 커지자 베이징시는 9곳의 도심 야시장을 개설했다. 외국 대사관 단지와 인접한 둥즈먼네이다제도 그중 하나였다.

야시장 9곳 중에 이 거리는 유독 번성했다.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디스코텍과 바(bar)들이 생겨나자 그 손님과 종업원들을 상대로 한 야식당도 덩달아 성업했다. 택시를 대절해 멀리서 찾아오는 이들까지 늘면서 첫 24시간 영업 식당도 등장했다. 풍물 야시장을 일컫는 '구이시(鬼市·도깨비 시장)'와 구분해 시민들은 이 야식 거리를 '구이제(鬼街·도깨비 거리)'라 불렀다.

하지만 구이제는 2001년 몰락의 위기를 맞았다. 시 당국이 유흥가가 몰려있던 구이제의 절반을 철거해버린 것이다. 40여곳 식당만 겨우 살아남았다. 하루아침에 존폐 기로에 선 식당 주인들은 사활을 걸고 간판 메뉴 개발에 나섰다. 그러다 당시 남부 장쑤성에서 큰 인기를 끌던 샤오룽샤에 주목했다. 남쪽의 샤오룽샤를 들여오되 얼얼한 마라 풍미를 가미한 베이징식 먹거리, 마라룽샤를 개발했다.

2003년 구이제에 첫 등장한 마라룽샤는 단번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비닐 장갑을 낀 일행들이 삼삼오오 마라룽샤를 까먹으며 맥주를 들이켜는 풍경은 구이제의 일상이 됐다. 한국의 치맥 같은 대표 메뉴가 된 것이다. 끊어졌던 발길이 되살아났다. 상인들은 거리 이름도 귀신 귀(鬼) 자와 발음이 같은 궤(簋·3000년 전 상 왕조 시대의 그릇) 자로 개명하고 분위기도 완전히 바꿨다.

베이징시는 올 들어 '야간 경제 활성화'를 선언했다. 미·중 무역 전쟁으로 인한 충격파를 차단하려는 내수 확대 전략의 하나다. 베이징시는 이를 위해 구이제를 야간 경제 중점지구로 선정했다. 구이제의 매운맛이 불황 확산을 막는 방파제 역할까지 맡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