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강제징용 배상 문제와 관련해 한국 정부가 전향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 한 다자(多者) 국제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양자 정상회담을 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산케이(産經)신문이 29일 보도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집권 당시 아베 총리를 향해 "위안부 문제 해결 없이 정상회담은 없다"고 하던 것과 정반대 상황이다. 올 하반기에도 한·일 정상이 참석하는 다자외교 일정이 이어지지만, 돌파구 없이 양국의 신경전이 이어지는 한 의미 있는 만남을 기대하긴 어렵다는 관측이다.

◇'박근혜 방식' 쓰는 아베 "공은 한국에"

산케이는 일본 정부의 입장에 대해 "한·일 청구권 협정을 위반하는 사태를 일방적으로 만든 한국 측의 변화를 기다리겠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휴가 중인 아베 총리는 "(문제 해결의) 볼은 한국 측에 있다"고도 했다. 한국 정부가 전향적인 상황 변화를 만들지 않는 한 정상회담은 없다는 것이다.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이 29일 오후 정부 세종청사 기자실에서 벽에 기대 생각에 잠겨 있다. 일본 수출 규제 조치의 부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던 유 본부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일본 측이 우리 정부의 양자 협의 요청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은 이날 "일본 측에 8월 2~3일 베이징에서 열릴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장관회의를 계기로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 경제산업상과의 양자 협의를 요청했으나 일본 측으로부터 '일정상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했다.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9월 하순 유엔 총회, 10월 31일~11월 4일 태국에서 열리는 아세안+3 정상회의, 11월 16~17일 칠레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APEC) 정상회의 등에 참여할 전망이다. 또 연내 중국에서 한·중·일 정상회의를 갖는 방향으로 실무 조율이 진행되고 있다.

이처럼 9월부터 두 정상이 조우하는 외교 이벤트가 매달 이어지지만 현재의 대치 국면에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는 한 '8초 악수'로 끝난 지난 6월 G20(주요 20국) 정상회의 같은 상황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아베 내각이 '박근혜 방식'을 쓰는 것을 두고 외교가에선 "아베 총리가 박 전 대통령에게 당한 그대로 되갚아 주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신각수 전 주일 대사는 "당시에는 우리가 (역사와 외교를 분리하지 못하는) 원트랙으로 갔다면, 지금은 아베 내각이 그렇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 때는 정상회담이 3년 6개월간 열리지 못했다.

◇광복절·일왕 즉위식 등 분수령 되나

외교가에선 광복절(8·15), 나루히토(德仁) 일왕 즉위식(10월) 등 양국의 굵직한 정치 일정들이 양국 대치 국면에 분수령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일단 정부는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어떤 대일(對日) 메시지를 담을지 고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도쿄의 외교 소식통은 "문 대통령이 항일·반일 메시지에 방점을 찍을 경우 대치 국면은 최소한 연말까지 이어진다"며 "반대로 전향적인 메시지가 나오면 극적 화해까진 아니어도 상황 악화를 막을 수 있는 외교적 공간은 확보될 것"이라고 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주일 대사를 지낸 최상용 고려대 명예교수는 이날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낙연 국무총리,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조세영 외교부 1차관의 역할론을 주문했다. 그는 "우리의 주장만 하고 있으면 좋은 기회도 놓친다. (세 사람이 노력해서) 일왕 즉위식에 우리 대통령을 초청하는 게 정상"이라고 했다.

일본이 정상 외교를 비롯해 모든 수준의 양자 협의에 소극적인 상황에서 유일하게 성사 가능성이 큰 것은 다음 달 2일 방콕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을 계기로 추진 중인 한·일 외교장관 회담이다. 한·미·일 외교장관회담도 조율 중이다.

문제는 공교롭게도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 심사 우대국 명단)'에서 제외하는 수출무역 관리령 개정안이 ARF 외교장관 회담 당일 일본 각의(閣議·국무회의 격)에서 처리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외교 소식통은 "각의 결정이 나오면 험악한 분위기 탓에 회담을 안 한 것만 못한 결과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박철희 서울대 교수는 "일본에서는 ARF에 기대를 거는 목소리는 전혀 없고, 화이트리스트 배제도 예고대로 추진한다는 기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