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前 금융위원장

“한 위기의 종말은 다음 위기를 잉태하는 시점이다.” 금융 위기 극복 과정에서 사용한 정책의 후유증이 자칫 다음 위기의 불씨가 된다는 뜻이다. 작년 말까지만 해도 올해 금리 인상과 유동성 축소를 예고했던 미국 연방준비은행(연준·Fed)은 금융 완화로 급선회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달 발표한 페이스북의 가상 화폐 개발 계획은 또 다른 차원의 시장 변수로 등장했다. 초저금리와 과잉 유동성으로의 유턴, 그리고 디지털 혁신의 돌풍이 국제 금융 시스템의 위협 요인이 된 셈이다.

국제 금융시장의 최대 관심사는 이달 말 미국 연준의 기준금리 결정이다. 현재로선 0.25%p 인하가 유력하다는 것이 월가의 지배적 시각이다. 지난주 IMF는 미·중 무역 갈등과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등을 이유로 금년도 세계 경제성장 전망치를 올해에만 네 번째 낮추면서 확장적 재정·금융 정책을 권고했다. 그런데 막상 눈길을 끄는 대목은 미국의 성장 전망치는 종전 2.3%에서 2.6%로 오히려 높인 점이다. 반세기 만의 최저 수준 실업률에다 초호황기를 맞은 미국의 금리 인하 단행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파이낸셜타임스(FT)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왜 '나 홀로' 성장을 누리는 미국이 금리를 내릴까. 미 연준의 통화정책 유턴이 경기 하강에 대비한 '보험성 금리 인하'라고는 하지만 내년 대선을 앞둔 미국 정부 입김을 부인하기 어렵다. 최근 터키 에르도안 대통령이 금리 인하에 반대한 중앙은행 총재를 파면한 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고금리를 강달러와 무역수지 적자 요인으로 지목해온 트럼프 대통령의 공개적 연준 압박은 중앙은행 독립성을 훼손하는 '정책의 정치화'다. 이번 미국 금리 인하가 세계 주요국 중앙은행들의 경쟁적 자국 화폐 가치 절하로 이어지는 '통화 냉전(cold currency war)' 즉 환율 전쟁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금리 인하와 유동성 확대는 '양날의 칼'이다. 기업과 개인의 신규 자금 조달 비용이나 부채 상환 부담을 낮춰 경기 부양 효과가 기대되는 반면 이미 임계치를 넘어선 부채 수준을 더욱 악화시키고 부동산 등 자산 가격 거품을 키우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 재정 확대에다 금리 인하까지 정책 수단을 소진할 경우, 국제 공조가 예전만 못한 현 상황에서 위기 대응 여력이 축소되는 것 또한 문제다.

지난달 발표한 페이스북의 가상 통화 '리브라' 개발 계획은 기존 국제 통화 질서에 심각한 도전이다. 한동안 잠잠해진 가상 화폐 열기와 논란을 재점화하기도 했다. 세계 인구 3명 중 1명이 사용하는 페이스북 네트워크를 통한 화폐 개발은 자칫 금융 안정 이슈를 넘어 국가 주권과 안보 문제까지 번질 휘발성이 있다. 리브라가 신(新)화폐 혁명의 기폭제가 될지 속단하긴 이르지만 새로운 형태의 글로벌 리스크가 될 소지가 크다.

페이스북은 G7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를 포함한 국제사회에서 뭇매를 맞고 일단 한발 물러나는 모습이다. 미국 의회와 행정부도 '사생활 침해, 개인 정보 노출, 금융 안정 훼손, 자금 세탁 우려' 등을 이유로 페이스북의 가상 화폐 개발 중단을 요구하고 있고 세계 굴지 언론사들도 경고음을 내고 있다. 금융 시스템의 기본 가치는 '신뢰'인데 개인 정보 유출 스캔들로 벌금 50억달러 폭탄을 맞은 페이스북은 소비자 신뢰를 잃었다는 지적과 함께 엄격한 규제가 필수라는 분위기다.

마이클 바 미시간대 공공정책대학원장은 2010년 월스트리트 개혁안(도드-프랭크법)을 설계한 금융 규제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다. 최근 방한 강연을 통해 향후 금융 위기를 막으려면 '혁신에 대한 오판(misunderstood innovation)'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디지털 금융 혁신은 촉진하되 암호 화폐는 소비자 보호와 금융시장 안정 측면에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지난 2년간 국내 가상 화폐 관련 사기 피해액이 2조7000억원에 이른다는 법무부 통계는 충격이고 북한 추정 해커들이 가상 화폐 투자자를 주 표적으로 공격하고 있다는 보도도 왜 가상 화폐 규제가 글로벌 추세인지 보여준다. 건전한 금융 생태계 조성은 금융 당국의 기본 책무다.

지난 18일 한은은 국내 경기 전망 악화로 기준금리를 0.25%p 전격 인하해 1.5%로 낮췄고 추가 인하 가능성까지 언급하면서 위기 경고음을 높였다. 한은의 선택은 불가피하지만 추락하는 경기를 반등시키기엔 역부족으로 보인다. 통화든 재정이든 '돈 풀기'보다 기업 활력을 살릴 정책 전환과 구조 개혁이 우선이다. 이달 초 발간한 OECD '2019년 구조 개혁 연례 보고서'도 한국의 규제 완화와 노동시장 개혁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국제 금융 리스크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보유 외화 4000억달러의 여유를 가진 상황이라도 그렇다. 3조달러가 넘는 외화를 가진 중국도 유사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판이다. 좋든 싫든 아시아의 대표적 안전 자산이자 기축통화는 아직은 중국 위안화가 아니라 일본 엔화라는 현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한·일 경제협력 체제의 복원이 시급한 과제다.

☞페이스북 리브라(Facebook Libra)

세계 최대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 업체인 미국 페이스북이 추진 중인 가상 화폐 이름으로, 2020년 발행을 목표로 개발 중이다. 페이스북의 가상 화폐 발행은 27억명에 이르는 막대한 페이스북 사용자 네트워크를 고려할 때 글로벌 금융 체제와 블록체인 생태계에 엄청난 변화를 줄 가능성이 있다. 다만 가상 화폐의 불법 유통 문제 등이 있어, 국제기구는 물론 세계 주요국 금융 당국은 국제 통화 질서와 금융시장에 큰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매우 신중한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