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미네 야스마사(長嶺安政) 주한 일본 대사가 8일 윤상현 국회 외통위원장을 만나 언급한 '한국 정부의 진전된 안(案)'은 결국 '제3국을 통한 중재위'를 어떤 형태로든 수용하라는 뜻으로 해석됐다. 한국이 정부 차원에서 참여해야 하는 '중재위'는 그동안 일본이 꾸준히 요구해왔던 방안이다. 일본이 '7월 18일'을 2차 경제 보복 조치의 기점으로 삼은 것도 그날이 '제3국 중재위' 설치에 대한 한국의 답변 시한이기 때문이다. 거부하면 추가 보복이 있을 것이란 게 현재까지 일본 정부의 입장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지금까지 중재위 구성 요구를 사실상 거부해 왔고 그런 입장에 변함이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의 중재위 구성 요구는 한·일 청구권 협정 제3조를 근거로 한다. 협정은 양국 간에 분쟁이 생겼을 때 외교 경로로 해결(3조 1항)→중재위 구성(2항)→제3국을 통한 중재위 구성(3항)으로 해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해당 조항은 강제 사항이 아니라 한쪽에서 거부하면 실현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지난 1월부터 일본 정부의 '외교적 협의' 요청에 이은 '중재위 구성' 요청에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며 답을 주지 않고 있다. 지금은 일본이 '3국 중재위 구성'을 요구하는 셋째 단계로 넘어가 있다.

우리 정부는 '대법원 판결에 행정부가 개입하기 어렵다'는 삼권분립 원칙을 내세우며 정부가 나서야 하는 '중재위를 통한 해결'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물론 일부 전문가는 굳이 중재위를 피할 이유가 없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국제사회에서의 일본의 영향력, 일본에 대한 호감도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 같다"며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은 없지만 제3국 중재위나 ICJ(국제사법재판소)로 간다고 해도 과거처럼 구제국주의 국가에 유리한 상황만은 아니다"라고 했다. 일단 중재위 트랙에 올려 제재를 철회시키고, 또 결론을 내기까지 긴 시간이 걸려 한숨 돌릴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청와대와 정부는 중재위든 ICJ든 '패배'했을 경우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박철희 서울대 교수는 "중재위나 ICJ로 가서 지게 되면 정부의 명운을 걸어야 할 수도 있다"며 "문재인 정부뿐 아니라 어느 정부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국민감정이 크게 작용하는 과거사 문제인 만큼, 질 경우 현 정부가 감수해야 할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커서 엄두를 못 낼 것이라는 얘기다.

아베 정부는 이번 사태가 터지기 전부터 외무성 조약국을 중심으로 '제3국 중재위'를 포함한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한 법리(法理) 검토를 끝낸 상태다. 일본은 중재위 구성에 우리가 응하지 않으면 ICJ로 이 문제를 가져간다는 계획이다. 외교 소식통은 "일본 정부는 신일철주금 등 자국 기업 자산이 강제 매각되는 것을 막는 게 목표이기 때문에 절차에 따라 ICJ 제소까지 간다는 방침이 서 있었다"고 말했다. 일본은 불리할 게 없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1965년 맺은 한·일 청구권 협정 2조에 모든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확인한다'는 문구가 들어가 있는데, 국제사회를 설득하기엔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일본의 태도에 대해 "이중적"이란 지적도 나오고 있다. 지난 2011년 헌재가 '우리 정부가 위안부 청구권 분쟁에 역할을 안 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리자 정부는 일본 측에 '한·일 청구권 협정 3조 1항'상의 '외교적 협의'를 요구했다. 우리 정부의 '외교적 협의' 요구는 2012년까지 공식적으로만 두 차례, 다른 외교 루트로 수차례 있었지만, 일본의 거부로 성사되지 않았다. 일본 측은 국제 여론상 불리하다는 판단에 따라 응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우리 정부는 중재위 요구도 검토했으나 '강제성이 없고 양국 관계가 더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실행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