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한국을 향해 ‘경제 미사일’을 쐈다. 반도체·스마트폰·TV처럼 현재 한국을 먹여 살리는 대표 상품들에 들어가는 핵심 소재에 대해 일본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일본은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폴리이미드 같은 독과점 핵심 소재를 그동안 포괄적인 자동 허가제로 수출해왔는데, 이제 그것을 엄격한 심사를 거쳐 건별(件別) 허가제로 수출하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조치가 발동된 지난 4일 이후 수출 허가를 받은 일본 기업은 한 곳도 없다.

문제는 우리에게 일본의 ‘수출 규제 미사일’을 막아낼 마땅한 ‘요격 미사일’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은 한국 기업의 책임이 아니다. 정권이 사태를 수렁에 빠뜨린 측면이 크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 이런 이들이 그 바쁜 주요그룹 총수들을 불러다 만나본 들 별 효험이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들을 만나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근본 요인은 문 대통령 자신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지금 당장 ‘외고집 대일(對日) 외교’를 버려야 한다. 현 정권의 코드 인사에 따라 자리를 꿰차고 앉은 대사나 외교관들 말고, 현역이나 은퇴자를 막론하고 대일 외교의 엘리트 실력자들을 소집해야 한다. 이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비상대책위원회를 당장 꾸려야 한다.

자꾸 독일과 일본을 비교해봐야 쓸데없다. 기회가 올 때마다 전몰 위령탑 앞에 엎드리는 독일과 잊을 만하면 망언을 쏟아놓는 일본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현실을 싸늘하게 바라봐야 한다. 이명박 정권 이래로 계속 되고 있는 한일 ‘냉골 기류’를 이대로 방치하면 양국 국민만 고통을 당한다. 한국 정부는 2017년에 위안부 관련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했고, 2018년 대법원이 강제징용 배상을 판결했다. 그러자 일본은 한국이 정부 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반발했고, 한국을 ‘움직이는 골대’라면서 비난해왔다.

급기야 아베 총리는 ‘한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논리를 이상한 방향으로 악화시키고 있다. 아베 총리는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에 제동을 건 것이 경제 보복도 아니요, 정치 보복도 아니요, 이제는 안보를 고려한 수출관리 차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한국은 (…) 징용공 문제에 대해 국제적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분명하니, (대북) 무역관리도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여기에 아베 측근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불화수소, 즉 에칭가스 대량 발주가 들어왔고, 그 에칭가스가 한국 기업에서 행방이 묘연해졌다, 에칭가스는 독가스나 화학병기 생산에 사용되는 것으로 행선지는 북한"이라는 것이다.

자,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일본에서 수출된 에칭가스, 불화수소가 한국 땅에 들어온 뒤 북한으로 넘어갔다고 했는데, 문재인 정부는 아베 정권에게 그 구체적인 근거와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해야 한다. 절대로 침묵하거나 어물쩍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이것은 한일 무역 분쟁 차원을 뛰어넘어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북한의 또 다른 대량살상 무기를 뜻하기 때문이다. 단, 우리는 이럴 때 아베 정권과 일본 국민들을 한데 묶으면 안 된다. 아베 정권과 일본 국민을 따로 떼어 분리시켜야 한다. 아베 정권이 일을 그릇 밀어붙이다 제발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다. 이런 일을 따질 때는 "일본이 한국에 수출한 에칭가스가 북한으로 넘어갔다는데, 아베 총리는 그 증거를 대라", 이렇게 저들의 발언을 갖고 총리와 그 측근들을 조여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경기도 교육청이 학교생활 친일 잔재청산 프로젝트라는 것을 만들어 ‘수학여행’, ‘파이팅’, ‘훈화’ 이런 말을 일제 잔재로 지목하는 일은 염려스럽다. 이런 식으로 따지면 ‘학교’ ‘교육’ ‘과학’ 같은 근대화 이후 생긴 거의 모든 단어가 일제 잔재가 된다. 이런 일은 그 자체도 문제지만 사회 전체에 정치적인 반일 감정을 불러일으켜 사태를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갈 위험성이 크다. 경기도 의회가 학교 내 ‘일본 전범기업 제품’에 인식표를 붙이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든지, 중소상인 연합회가 일본 제품 판매중지를 선언한다든지, 농민 단체가 일본 제품 불매와 여행 거부 운동을 벌이는 것도 그다지 바람직스럽지 않다. 우리 방탄소년단 BTS의 오사카 공연에는 지난 토요일, 일요일 두 차례 5만 관중석이 완전 매진됐다. 일본은 우리 한류와 우리 제품을 팔아야 하는 아주 중요한 시장이다. 이 시장을 우리 손으로 망가뜨리면 안 된다.

다시 강조하지만, 반도체 소재 수출 거부를 선거에 이용하는 일본 정치인과, 일본 기업이나 국민을 한데 섞으면 안 된다. 아울러 일본이라는 나라와 그 정권은 언제든지 수출 품목으로 정치 보복을 하는,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국제적 여론과 인식을 확산시킬 필요가 있다. 일본과 핵심 소재를 거래하는 다른 나라나 기업들은 이번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일본은 그런 측면에서 제 자신의 신뢰도를 스스로 깎아먹고 있다.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을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빠른 길은 문재인 대통령이 아베 총리를 지금 바로 만나는 것이다. 서울이나 도쿄가 아니라면, 제주도도 좋고 쓰시마도 좋다. 위기는 돌파구가 될 수도 있다. 문재인·아베 두 사람이 만나야 한다. 결자해지(結者解之)다. 정치와 외교가 일을 망가뜨려놓고 왜 기업에 책임을 떠넘기는가. 문 대통령은 ‘북한’과 ‘김정은’만 바라보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번 일이야말로 대통령이 책임지고 나서야 한다.

*조선일보 김광일 논설위원이 단독으로 진행하는 유튜브 ‘김광일의 입’, 상단 화면을 눌러 감상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