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파리좌안 1940-50
아녜스 푸아리에 지음|노시내 옮김|마티
496쪽|2만5000원
"독일 점령기만큼 자유로웠던 적은 없었다. 나치의 맹독이 우리의 사고를 해치고 있었기에 자유로운 사고 하나하나가 전부 승리였다. 우리의 투쟁 상태는 끔찍할 때가 많았어도 이 피폐하고 견디기 어려운 상황, 이른바 '인간 조건'이 우리에게 열린 삶을 허락했다."
장 폴 사르트르(1905~1980)가 남긴 이 말이 책을 읽어나가는 길잡이가 될 것 같다. 파리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공부한 저널리스트 아녜스 푸아리에의 이 책은 1940~1950년 파리 좌안(左岸)을 누볐던 지식인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센강 왼편의 파리 좌안은 전통적인 지식인 거주지라 '지성(知性)의 산실'로 여겨지는 공간. 저자는 2차 세계대전 중의 독일 점령기, 그리고 종전 후 전쟁의 포화가 채 가시지 않은 파리에서 새로운 사상과 예술이 싹트고 꽃피는 과정을 그려낸다.
카뮈가 '이방인'을 쓰고, 베케트가 '고도를 기다리며'를 탈고했으며, 피카소가 에로틱한 희열을 발산하던 1940년대 파리. 수십 명 등장인물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사르트르와 그의 연인 시몬 드 보부아르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5년 9월 이 두 사람이 주축이 돼 창간한 문예지 '레 탕 모데른(Les Temps Modernes)'은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중시하는 실존주의의 유행을 알린다. 이 잡지에 기고한 '전쟁의 종결'에서 사르트르는 "전쟁은 모든 사람을 환상에서 깨워 알몸으로 만들어놓았다. 사람들은 이제 자기 자신에게 의지할 수 있을 뿐이며, 아마도 이것이 유일하게 유익한 결과물인지 모른다"고 썼다.
1945년 10월의 사르트르 강연에선 '새로운 철학'에 충격받은 여성 두 명이 실신하기도 했다. 실존주의는 '컬트'가 되어 추종자들을 거느리게 되었고, 디오르 드레스에 맞먹을 만한 공식 수출품이 되었다. 무게가 딱 1㎏이라 금속이 귀했던 전쟁 중에 주부들이 저울추 대신 사용했던 사르트르의 대표 저서 '존재와 무'가 유행의 첨단을 걷는 책으로 다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가장 엄혹한 시대에 가장 자유로운 사상이 싹텄다. 여성주의 역시 이 시기의 성과다. 보부아르가 1949년 출간한 '제2의 성(性)'은 "여성이 '여성성'을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 수동성, 의존성, 대상화된 실존을 받아들이도록 길들여진 것"이라며 "직업과 경제적 독립만이 여성이 자주성과 자유를 얻을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책의 한 장을 통째로 여성의 낙태권에 할애하기도 했다. 책은 수많은 남성의 분노를 샀지만,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 카뮈에게 맞먹는 인물로 자리 잡게 됐다.
실존주의는 문학·미술 분야에서도 대안을 제시했다. 누보로망(신소설)이 출현했고,'앵포르멜(비정형)' 운동이라 불리는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방식의 표현이 유행했다. 청동으로 주조한 길고 갸름한 인물 조형물을 내놓은 자코메티는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을 그 누구도 아닌 오직 사르트르가 써주길 원했다.
사상이 자유로운 시대에 사랑도 자유로웠다. 전쟁통에 간신히 죽음을 면했다고 생각한 파리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관습 타파와 자유를 갈구했다. 가족은 폐기해야 할 제도였고, 자녀는 어떻게든 피해야 하는 성가신 존재였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연인이 생겨도 용인하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동반자 관계는 할리우드 스타처럼 동시대인들을 매혹했다. 카뮈는 특히 이들을 부러워했다. 그는 아내가 임신하는 바람에 연인인 배우 마리아 카자레스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았다. 카뮈와 보부아르는 서로 끌렸지만, 지적인 여자를 두려워했던 카뮈는 보부아르가 자신을 무시할까 미적거렸다.
잘 짜인 피륙처럼 밀도 있는 책. 지적이면서 낭만적인 파리 풍경을 섬세하게 그려내지만, 신경안정제와 흥분제에 동시에 의존했던 당시 지식인들의 병적인 측면도 간과하지 않는다. 독일 점령에서 벗어난 파리에서 벌어진 '숙청' 과정을 언급한 구절도 의미심장하다. "프랑스 지성인 대다수와 일반 대중은 나치 협력자에 대한 이중적인 심리를 드러냈다. 점령기에 수동적이었을수록 나치 협력 혐의자들에게 더 심한 복수심을 드러냈다. 자신의 소극성에서 오는 수치심이 그들을 더욱 공격적으로 만들었다."(1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