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필리핀 말라테에서 체포된 김대업씨가 지팡이를 짚고 자신의 영문 이름과 '사기(fraud)'라는 죄명이 적힌 팻말을 들고 서 있다. 김씨는 지난 2016년 10월 사기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중 해외로 도피했다.

지난달 30일 오후 4시 30분쯤(현지 시각) 필리핀 말라테 지역의 한 호텔. 짧은 스포츠머리를 한 남자가 손에 지팡이를 든 채 휠체어를 타고 로비에 나타났다. 3년 전 사기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중 해외로 도피한 김대업(58)씨였다. 한 남성이 그의 휠체어를 밀어주고 있었다.

둘은 숙박비를 결제하고는 택시를 잡으려 서둘러 호텔 입구로 나섰다. 경찰이 있다는 낌새를 눈치 챈 듯했다. 그 순간, 필리핀 코리안데스크(현지 파견 한국 경찰) 권효상 경감과 필리핀 이민청 도피사범 추적팀이 바로 다가섰다. 권 경감이 "김대업씨 맞느냐"고 묻자, 김씨는 "맞는다"고 한 뒤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군(軍) 부사관 출신인 그는 2002년 대선 직전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장남이 돈을 주고 병역을 면제받았다"는 이른바 '병풍(兵風) 의혹'을 제기했던 인물이다. 이 의혹으로 타격을 입은 이 후보가 패배하고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당선됐다.

당시 일부 민주당 인사는 그를 '의인(義人)'이라고 했지만 그의 폭로는 모두 허위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대선이 끝난 뒤 검찰 수사관을 사칭한 혐의 등으로 2004년 징역 1년 10개월을 확정받았다. 노무현 정권 말기 그에 대한 사면 시도가 있었지만 법무부 반발로 무산되기도 했다. 그는 사면이 무산된 후 병풍의 내막을 폭로하겠다고 예고했지만 실제 하지는 않았다.

그는 출소 후에도 여러 차례 범죄를 저질렀다. 2008년 국정원 직원을 사칭해 부동산 투자 명목으로 초등학교 동창으로부터 2억7000만원을 가로챈 혐의(사기)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2016년엔 "최문순 강원지사와 친분이 있으니 강원랜드 등의 방범 카메라 교체 사업권을 따주겠다"면서 관련 업체 직원으로부터 2억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았다. 그가 환청·불안 증세를 호소하자 검찰은 치료를 이유로 '시한부 기소 중지' 명령을 내렸다. 그는 그 틈을 타 그해 10월 필리핀으로 달아났고,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에 수배됐다. 김씨에게는 현재 10건의 수배가 내려진 것으로 확인됐다.

그로 보이는 사람이 필리핀 마닐라 말라테 지역에서 돌아다닌다는 첩보가 입수된 건 지난달이라고 한다. 필리핀에 파견된 한국 경찰이 추적에 나서 지난달 30일 한 호텔에서 그를 붙잡았다. 이 호텔은 2성급으로 저렴한 편인 것으로 알려졌다.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아들 병역 비리 의혹을 제기한 김대업(오른쪽)씨가 검찰에 출두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체포될 당시 그는 짙은 색 러닝셔츠에 체크무늬 반팔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샌들을 신고 있었지만 발 전체가 퉁퉁 부어 있었고, 혈색도 어두웠다고 한다. 그를 체포한 권 경감은 본지 통화에서 "김씨는 건강이 안 좋아 휠체어와 지팡이가 없으면 스스로 한 발자국도 걷지 못하는 상태였다"고 했다.

경찰에 체포된 직후 김씨는 "옛날에 내가 이회창씨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그는 필리핀에서 한동안 한국인 남녀와 콘도에 함께 머물렀다고 한다. 돈을 받고 김씨를 돌봐주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김씨는 경찰에서 "그 사람들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돈도 뺏겼고, 그들이 내 휴대폰도 부숴버렸다. 그래서 지금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콘도에서 나온 후 게스트하우스 등을 전전했다고 한다. 체포된 호텔에서도 그는 채 하루를 머물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과 법무부는 불법 체류자 신분인 김씨가 필리핀에서 추방되면 국내로 송환할 계획이다. 그는 불법 오락실을 운영한 혐의 등으로 2015년 징역 1년 2개월에 집행유예 3년, 보호관찰 처분이 선고된 상태였다. 그가 해외로 도피하면서 보호관찰 의무를 준수하지 않아 지난해 집행유예가 취소됐다. 이에 따라 그는 국내로 송환되면 이 징역형을 살아야 한다. 사기 혐의에 대한 수사는 별도로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