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대학의 조센징|정종현 지음|휴머니스트|392쪽|2만원
일제 패망 후 귀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은 건국의 열정만 뜨거웠을 뿐, 이를 뒷받침할 국가 운영 방안이나 행정 조직이 없었다. 그런 그들 눈에 총독부 출신 조선인 관료들이 들어왔다. 그해 12월 17일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를 위원장으로 '행정연구위원회'가 출범했다. 총독부 고등문관 출신 약 70명이 참여했다.
신익희가 그들 앞에서 연설했다. "애국이니 구국이니 하며 왜적과는 타협하지 않고 왜놈잡이 하겠다고 천방지축 돌아다니던 사람들, 그러니까 나부터도 행정에 대한 능력과 수완이라고는 털끝만치도 없는 게 사실입니다. 비록 여러분은(…) 조금 친절을 왜인에게 표시했다 하더라도 해방된 조국에 헌신 노력하여 건국의 기초와 공로를 세움으로써…."
해방 후 궁지에 몰렸던 이들에게 내려진 구원의 밧줄이었다. 이 중 10명은 헌법 초안을 만드는 전문위원으로도 활약했다. 핵심 인력은 일본이 세운 여러 제국대학의 법학부 출신이었다. 고병국·임문환(도쿄제대), 노용호(교토제대), 김용근·유진오·윤길중(경성제대) 등 6명이다. 제국대학 졸업생들은 친일뿐 아니라 건국에도 이처럼 강렬한 그림자를 남겼다.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북한 헌법을 기초한 최용달은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했고, 김일성종합대 창립을 주도한 정두현과 신건희도 제국대학을 나왔다. 1954년 발족한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62명 중 39명도 제국대학 출신이다.
10년 전 교토에서 처음 조선인 유학생 명부를 접한 정종현 인하대 교수는 이후 제국대학에서 공부한 조선인들의 유학 실태와 그 후 식민지 조선과 해방 후 조국에 끼친 영향을 추적해 이 책에 기록했다. 그가 찾아낸 자료에 따르면 일제하 조선 청년 1000여명이 제국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도일(渡日)한 것으로 추산되고, 이 중 784명이 도쿄·교토·도호쿠·규슈 등 일본 내 7개 제국대학을 졸업했다. 서울과 대만에도 제국대학이 세워졌지만 조선 청년들은 일본 유학을 선호했다. 그들은 '조선인 사절'이라고 써 붙인 하숙집 앞에서 울분을 삼키며 공부했다.
식민지에서 온 유학생들에게 일본은 거대한 모순 덩어리였다. 유학생들은 항일과 친일로 갈리거나, 해방될 때까지 두 노선 사이에서 곡예를 했다. 인촌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도 그중 하나다. 1911년 15세 나이로 관부연락선을 탄 그는 1921년 조선인 최초로 교토제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돌아왔다. 경성방직 2대 사장으로 만주까지 사업을 확장하며 성공한 민족기업인이 됐고, 이윤을 사회에 환원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이 강요한 각종 직함과 헌금, 학병 권유에 동원돼 해방 후 반민특위에 구속됐다가 무죄방면되는 고초도 겪었다. 반면 같은 대학 사학과에 다니던 송몽규는 졸업도 못하고 옥사했다.
관동대지진으로 유학생 약 1000명이 희생당했지만, 그들을 숨겨주거나 학비를 대준 이들 또한 일본인이었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고 총독부 관리를 거쳐 해방 후 농림부 장관을 역임한 임문환은 유학 시절 지독히 가난했다. 일본에서 인력거꾼, 변소 청소부를 전전하며 고교를 졸업하고 도쿄제대에 진학했지만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애태웠다. 이때 손을 내민 이가 이와나미서점 사장 이와나미 시게오였다. 임문환을 야간 직원으로 채용해 급여 외에 저녁밥을 주고, 방학 때면 별장을 공부방으로 내줬으며, 대학 졸업식 날 입을 양복까지 선물했다.
조선총독부도 학자금을 지원했다. '사의찬미'를 부른 윤심덕을 비롯해 육종학자 우장춘, 훗날 서울대 총장을 지내는 권중휘 등이다. 저자는 우장춘의 예를 들어 관비유학생을 친일파라고 부르는 데 의문을 제기한다. 아버지 우범선은 민비 시해에 가담한 뒤 일본으로 도피했지만 그는 귀국해 한국 농업의 기틀을 다졌고 1959년 임종 때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는 유언을 남겼다.
제국대학은 친일 엘리트 양성소이자 독립운동과 건국의 수원지였다. 저자는 "제국대학이라는 지식 제도와 관련된 근대 한국의 경험을 모두 악(惡)으로 도덕화하고 그것을 적출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라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