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4男' 정한근, 해외 도피 21년 만에 체포…서울구치소 수감
고교동창 이름으로 신분세탁…미국·캐나다 시민권 획득
밴쿠버 사는 아내 후견인 역할하다 검찰에 꼬리 잡혀
2년 전 에콰도르에 머물다 파마나 거쳐 LA 가려다 체포돼
검찰, 12년 前 도주한 정태수 전 회장 생사·소재지도 추궁

회삿돈 322억원을 빼돌린 혐의로 수사를 받던 중 해외로 잠적했던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넷째 아들 정한근(54)씨가 21년 만에 체포돼 서울구치소에 구속수감됐다. 정씨는 고교동창인 지인의 신분을 도용해 미국과 캐나다 시민권을 받은 뒤 미국·캐나다·에콰도르 등 해외 여러 국가에서 생활해온 것으로 확인됐다.

대검찰청 국제협력단은 23일 회삿돈 322억원을 횡령한 뒤 국외에 은닉하고 국세 253억원을 체납한 채 해외도피 생활을 하던 정씨를 국내로 송환하기까지의 과정을 밝혔다.

◇고교 동창 A씨 이름 이용해 신분세탁…사진· 지문 A씨와 달라 덜미
정씨는 1997년 11월 한보그룹 자회사인 동아시아가스(EAGC)의 자금 322억원을 횡령해 스위스의 비밀 계좌로 빼돌린 혐의로 1998년 6월 한 차례 검찰 조사를 받았다. 정씨는 조사 직후 도주했고, 같은 해 7월 법원에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그러나 출입국 내역상에 출국기록이 없어 막연히 밀항한 것으로만 추정됐다.

검찰은 정씨 혐의에 대한 공소시효 만료가 다가오자 2008년 9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재산 국외 도피 및 횡령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그러나 기소 이후에도 정씨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공판이 진행되지 못했고, 2023년 9월까지 재판시효가 경과될 경우 법률상 처벌이 불가능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지난 22일 오후 정한근씨가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을 나서며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정씨의 꼬리가 잡히기 시작한 건 측근의 언론 인터뷰 때문이었다. 2017년 정씨가 미국에 머물고 있다는 내용의 측근 인터뷰가 언론에 보도되자, 검찰은 지난해 8월부터 본격적으로 추적에 나섰다. 검찰은 여권발급 신청서 등을 토대로 정씨의 부인과 자녀가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검찰은 이후 캐나다 국경관리국(CBSA) 일본주재관의 협조를 받아 정씨 가족의 후견인으로 캐나다 시민권자인 A(55)씨의 이름이 사용된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정씨의 고등학교 동창인 A씨는 정작 국내에 거주하고 있었다. 검찰은 A씨가 캐나다에 간 사실이 없었고, 2010년엔 국내에서 다른 이름으로 개명한 사실을 수상하게 여겨 A씨 명의의 영주권과 시민권 관련 자료를 확보해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정씨의 가족이 캐나다에 제출한 A씨의 사진과 A씨의 외모가 다르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또 미국 국토안보수사국(HSI)으로부터 받은 A씨 지문정보를 대검 국가디지털 포렌식센터(NDFC)를 통해 확인한 결과 오른쪽 검지(집게손가락)가 정씨의 주민등록상 지문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정씨가 A씨의 이름을 이용해 미국에서 시민권을 획득하는 등 신분세탁을 해왔던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정씨는 A씨의 신분을 도용해 미국과 캐나다에서 영주권과 시민권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에 따르면 정씨는 중남미의 벨리즈 시민권자라고 주장해 2007년 캐나다 영주권을 취득했다. 이듬해 미국 영주권도 취득했다. 2011년과 2012년에는 미국 시민권과 캐나다 시민권까지 차례로 받았다.

◇2년 전 에콰도르에 입국…檢, 범죄인 인도 거부하자 '출국 사실만 알려달라"
검찰은 미국 국토안보수사국(HSI) 한국지부 등과 협조해 추적한 끝에 2017년 7월 정씨가 에콰도르에 입국한 사실을 확인했고, 정씨가 사는 지역까지 특정했다.

그러나 지난 4월 에콰도르 법원은 '범죄인 인도(引渡) 조약'이 체결돼 있지 않다는 이유 등으로 정씨를 인도해달라는 청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검찰은 정씨의 출국 사실을 미리 알려달라고 에콰도르 당국과 협의했다.

정씨가 움직이길 기다리던 검찰은 지난 18일 에콰도르 내무부로부터 정씨가 오전 4시 23분(현지 시각) 비행기를 타고 파나마로 출국한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 정씨의 최종 목적지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였다.

검찰은 미국 HSI 한국지부를 통해 파나마 이민청에 정씨의 수배사실을 알렸다. 파나마 이민청은 정씨가 한나절 만에 공항에 도착하자 입국을 거부하고, 공항 보호소에 구금했다. 정씨의 구금 사실이 주파나마 한국대사관에 전달됐고 검찰은 법무부, 외교부, 경찰청 등과 협의해 정씨를 브라질과 두바이를 거쳐 국내로 송환하기로 했다.

이후 정씨가 한국에 오기까지 꼬박 57시간의 송환작전이 펼쳐졌다. 파나마 공항에 구금됐던 정씨를 브라질까지 7시간에 걸쳐 옮겼고, 브라질에서 두바이로 또 14시간에 걸쳐 정씨를 이송했다. 검찰 호송팀이 지난 21일 오전 3시 55분 도착해 정씨를 인도받았고, 22일 오전 3시 35분쯤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통해 최종 송환했다.

정씨는 같은 날 오후 1시 23분쯤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외투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고개를 숙인 정씨는 취재진의 질문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구속영장은 21년 만에 집행됐다.

1999년 2월 국회 환란특위의 경제청문회에 정태수 전 회장이 하얀 옷을 입고 휠체어에 탄 채 증인으로 출석했다.

검찰은 정씨를 서울구치소에 구금했다. 정씨가 장시간 송환으로 인한 피로를 호소해 오는 24일부터 정씨를 상대로 혐의와 관련된 조사를 진행할 방침이다. 또 해외로 도주한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생사(生死)와 소재지 등도 파악 중이다. 정 전 회장이 살아있다면 현재 나이가 96세다.

정 전 회장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은마상가 일부를 영동대 학생 숙소로 임대하는 허위계약을 맺고 임대보증금 명목으로 72억원을 받아 횡령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1심 재판부는 2006년 2월 정 전 회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으나 건강상 이유와 피해변제를 시도한다는 점을 들어 법정구속하지는 않았다. 정 전 회장은 이듬해 일본에서 치료를 받겠다며 법원에 낸 출국금지 집행정지 신청이 받아들여지자 곧바로 출국했다.

법원은 정 전 회장이 불출석한 상태에서 재판을 계속 진행해 2009년 징역 3년 6개월을 확정했다. 하지만 정 전 회장이 12년째 귀국하지 않고 있다. 정 전 회장이 송환될 경우 우선 확정된 징역형을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