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숙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요즘 추경 관련 대치 상황을 보면 정부가 참 딱하다. 미세 먼지로 악화된 여론에 적극 대응하고자 덜컥 추경 편성을 선언했지만, 경제 상황도 좋고 정책도 문제없다고 하려니 추경의 내용과 규모는 제한됐다. 이제는 그나마도 통과시키기 위해 경제가 어렵다고 드디어 인정했지만, 원인을 철저히 대외 여건에 미뤘으니 제대로 된 해법이 나올 리 없다. 이런 행태는 '재정 중독'이라는 신조어로 비판받고 있다. 상황이 나빠지면 곳간에만 기대고 휘발성 지출만 나열할 뿐, 이렇다 할 대책을 세울 식견도, 정책 오류를 되돌아볼 정직함도 결여됐다는 의미인 듯하다.

그런데 재정 중독이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대한 진단인 만큼, 근저에 흐르는 경향을 함께 짚는 것도 중요하다. 이는 정권을 누가 잡더라도 국가의 미래를 위해 훼손해서는 안되는 영역, 즉 경제 체질과 제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사명이 '정치 기술'적 고려 때문에 너무 쉽게 희생된다는 점이다. 일례로, 대외 여건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근래 경제 체질이 급격히 악화된 것은 주 52시간 근로와 최저임금의 과도한 상승, 이로 인한 경제 주체의 불안에 주로 기인했다. 점진적으로 추진하기로 합의했던 주 52시간제를 급작스레 시행한 것은 근로자의 임금을 더 인상시키고 사업장 내 노사의 힘 관계를 변화시켜 노조 등 핵심 근로자의 지지에 보은하는 성격이 강했지, 장시간 노동 개선을 위한 진정성은 찾기 어렵다. 옆 나라 일본은 60시간 이상의 심각한 장시간 근로 비율을 내년까지 6%로 줄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시급한 것부터 부작용을 줄이며 해결하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심각한 장시간 근로로 누가 얼마나 고통받는지는 관심도 없다.

정책이 가져온 충격을 감지하고 책임지는 것 역시 정치적 고려로 좌우된다. 재작년 최저임금이 과하게 인상된 데에는 정부의 다양한 압력이 최저임금위원회에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반발이 커지자 청와대 정책실장은 인상률이 너무 높아 본인도 놀랐다는 무책임한 발언으로 국민을 더 놀라게 했다. 성장률 2% 경제에서 최저임금을 16.8% 올리는 무리수로 핵심 기반의 지지를 다진 후, 영세 자영업자의 지지가 휘청대니 나 몰라라 한 셈이다.

국민연금도 제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국가 스튜어드십의 실종을 여실히 보여준다. 연금은 한 나라 복지의 핵심 중 핵심으로, 처음 도입도 어렵지만 세대 간 이해가 다를 경우 사회적 역량을 최대한 모아내야 지켜나갈 수 있다. 현재 국민연금은 길게 봐도 30년 안에 제도의 존립 자체가 위험할 정도의 재정 위기를 안고 있지만, 금번에 정부가 내놓은 개혁안 네 가지를 보면 어느 하나 해결책을 담고 있지 않다. 심지어 1안은 '지금 이대로'다. 껄끄러우면 안 하는 것도 대안이라니 기가 막힌다. 거기다 보험료 인상을 담은 안들마저도 연금급여 인상을 병행했기 때문에 재정 상황을 거의 개선시키지 않는다. 연금제도를 지키려는 진정성 없이 개혁안을 만드는 척만 한 셈이다. 결국 표에 도움이 안 되는 개혁은 피하고 보겠다는 의지다.

연금과 함께 사회정책의 핵심 기둥인 건강보험 역시 정치에 휘둘려 장기적 방향이 뒤틀렸다. 문재인 케어는 '국민이 원하면 다 제공합니다'라는 다디단 표어를 전면에 내세워 의료보장 부문에서 각국의 축적된 지혜를 정면으로 거스른 사례다. 건강보험은 지출 폭발의 위험 인자가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보장 범위를 제한하고 그 원칙을 분명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2008년에 28조원이던 급여 지출이 불과 10년 만에 70조원에 달하고 증가율은 OECD 최대 수준이다. GDP 대비 의료비 비중도 OECD 평균에 육박해 의료비 지출이 선진국보다 적다는 것도 옛말이 됐다. 그런데도 선진국이 예외 없이 공적의료비 지출의 총량을 통제하고 급여 항목 선별에 공을 들이는 것과 정반대로 우리는 모든 의료 서비스를 건강보험으로 포괄하겠다고 천명했다. 폭발하는 보험재정에 관해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대책은 '국고 지원을 늘리는 것'이다. 국고건 보험료건 모두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온다는 기본 상식마저 가볍게 무시했다.

이쯤 되면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나라, 빚잔치하는 나라 같다. 정권을 잡은 그룹에 '정의'란 정권 재창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흔히 체념조로 말하지만, 그 목적을 위해 국가 시스템을 보존하는 역할을 저버리는 것까지 그러려니 해서는 안 된다. 그동안 애써 쌓아온 제도적 자산과 경제 체질을 탕진한 후에 무슨 미래가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