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정 사건의 재구성…치밀한 계획 범죄 15일간의 행적
#1. 父子 면접교섭일 결정 다음날부터 범행 도구 등 검색
#2. 수면제, 흉기, 청소도구까지 미리 준비
#3 아들 게임하는 동안 아들 보러 온 친부 살해
#3. 펜션서 범행 후 이틀 동안 시신훼손
#4. 남편 실종신고 후 경찰 통화 때 '모르쇠'
#5. 바다에 시신 일부 유기 후 아버지 집에서 2차 훼손
범행동기·수법은 아직 미궁…경찰 증거 수집·시신 수색 계속

고유정(36)이 지난달 25일 제주시 조천읍 한 펜션에서 전(前) 남편 강모(36)씨를 흉기로 살해할 당시 6세 아들은 펜션 내 다른 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아들을 보기 위해 찾아온 남편을 어린 아들이 함께 있는 펜션에서 살해한 것이다. 하지만 펜션이 넓어 어린 아들은 엄마의 잔혹한 범행을 몰랐을 것이라고 경찰은 추정했다.

제주동부경찰서가 11일 발표한 ‘제주 펜션 전 남편 살인 사건’의 수사결과를 보면 피의자 고유정은 범행을 치밀하게 사전에 계획해 실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고유정은 지난달 9일 재판에서 법원이 부자(父子)의 면접교섭을 인정한 다음날부터 사실상 범행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것으로 조사됐다.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면제를 미리 구입한 고유정은 고향인 제주도로 건너간 뒤 쇼핑하며 표백제와 청소도구, 고무장갑 등 살인과 시신 유기 과정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했다. 고유정은 범행도구를 구입하면서 마트에서 포인트를 적립했고, 범행 후에 불필요한 물품을 환불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경찰은 그러나 고유정이 ‘사이코패스'는 아니라고 봤다. 프로파일러들은 고유정이 전 남편과 아들의 면접교섭 때문에 재혼한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파탄날 것으로 걱정해 범행을 계획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픽=김란희

◇전 남편-아들 면접교섭일 결정되자 바로 범행 준비
경찰에 따르면 고유정이 휴대전화로 '니코틴 치사량' '살인도구' '시신유기 방법' 등을 검색하기 시작한 것은 범행 보름 전인 지난달 10일이다. 바로 전날인 9일 고유정은 아들의 면접교섭과 관련 재판 때문에 법원에서 강씨를 만났다. 이 때 전 남편과 아들의 면접교섭일이 지난달 25일로 정해졌다.

일주일쯤 뒤인 지난달 17일 고유정은 충북 청주시의 자택에서 약 20km 떨어진 병원에서 감기약 처방을 받고 병원 인근에서 약을 샀다. 이때 고유정이 산 약에 든 졸피뎀 성분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정밀 약독물검사 결과 강씨의 혈흔에서도 검출됐다.

박기남 제주동부경찰서 서장은 "고유정이 사전에 졸피뎀 성분의 수면제를 구입했고, 피해자의 혈흔이 비산(飛散)된 형태를 볼 때 고유정은 수면제를 복용해 몽롱한 상태 또는 반(半)수면 상태에 있는 강씨를 흉기로 최소 3회 이상 찔러 숨지게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유정은 이튿날인 지난달 18일 전 남편과 만나기로 한 날짜(25일)보다 일주일 일찍 여객선으로 제주에 들어왔다. 시신을 옮기는 데 사용된 자신의 차도 함께 가지고 왔다. 시신훼손을 위한 흉기도 미리 준비했다.

이후 고유정은 범행에 사용할 갖가지 물품 구입에 나섰다. 제주도 입도 나흘 만인 지난달 22일 제주시의 한 마트에서 흉기를 비롯해 범행 현장을 청소하는데 쓸 표백제, 베이킹파우더, 고무장갑, 세제, 세숫대야, 청소용 솔 등을 샀다. 고유정은 당시 카드로 결제하면서 본인의 휴대전화로 바코드를 제시해 포인트까지 적립했다.

◇"친아버지-6세 아들 만나는 날, 아들 게임하는 동안 전 남편 살해"
범행 당일로 추정되는 지난달 25일은 전 남편과 6세 아들이 만나는 날이었다. 고유정은 이날 오후 5시쯤 전 남편, 아들과 함께 조천읍 펜션에 입실했다. 강씨는 이날 오후 8시쯤 펜션에서 아버지와 마지막 통화를 했다. 그리고 오후 9시 16분쯤 강씨의 휴대전화는 꺼졌다. 경찰은 이 시간대에 고유정이 피해자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범행 당시 고유정과 전 남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펜션 내 다른 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고유정은 당초 경찰 조사에서 아들이 잠든 사이 범행을 했다고 진술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경찰은 파악했다. 경찰 관계자는 "아들이 평소 하나의 일에 몰입하면 다른 일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펜션이 워낙 넓었고, 나이가 어린 아들이 게임에 집중하고 있어 당시 상황을 알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날인 지난달 26일 고유정은 아들을 제주시의 친정집에 데려다 준 뒤 다시 펜션으로 돌아왔다. 이어 지난달 27일 오전 11시 30분 펜션에서 퇴실할 때까지 피해자의 시신을 훼손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서 미리 산 청소도구를 활용해 현장을 청소했다.

고유정은 펜션에서 나선 뒤 오후 4시쯤엔 강씨의 휴대전화를 이용해 자신의 휴대전화로 "취업도 해야 하니 (성폭행 혐의로) 고소하지 말아달라’는 취지의 문자를 보냈다. 고유정이 휴대전화에 임시저장해뒀던 '조작 문자'였다. 마치 숨진 전 남편이 살아있는 것처럼 속이면서, 또 피해자가 오히려 자신을 성폭행하려 했다고 주장하기 위한 의도로 추정된다. 고유정은 이후 경찰 조사에서 "전 남편이 덮치려 해 수박을 썰기 위해 손에 들고 있던 흉기를 한두 차례 휘둘렀다"며 우발적범행을 주장했다.

강씨의 유족은 같은 날 오후 8시쯤 피해자 실종 신고를 했다. 경찰은 신고 이후 3시간 뒤에 고유정에게 피해자의 행방을 물었다. 고유정은 "강씨가 오후 8시쯤 혼자 펜션을 나갔다"고 둘러댔다.

지난달 29일 피의자 고유정이 인천의 한 가게에서 시신 훼손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방진복, 덧신 등을 사고 있다.

◇ 여객선에서 '목공용 전기톱' 주문…2차 시신 훼손 때 사다리·방진복까지 준비
고유정은 펜션을 나온 다음 날인 28일 오후 3시 25분쯤 범행에 쓰인 물품을 샀던 마트를 다시 찾았다. 범행 후 남은 표백제와 배수관 세정제, 박스테이프 등을 환불하는 모습이 마트 폐쇄회로(CC)TV에 고스란히 찍혔다. 오른손에는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다. 고유정은 "시신 옆에 둔 물품이라 찝찝해 환불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같은 날 오후 6시쯤엔 제주시 다른 마트에 들러 종량제봉투 30장과 여행용가방을 구입했다. 경찰은 고유정이 여객선을 타기 전 쓰레기봉투와 가방에 강씨의 시신을 옮겨담은 것으로 보고 있다.

마트를 나선 고유정은 전남 완도군으로 향하는 여객선을 탔다. 여객선 CCTV에도 오후 9시 30분부터 7분 동안 고유정이 피해자의 시신 일부가 든 것으로 추정되는 봉지 등을 바다에 버리는 모습이 포착됐다.

시신 훼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고유정은 밤새 운전을 해 지난달 29일 오전 4시쯤 경기 김포시의 아버지 집으로 갔다. 완도행 배 위에서 인터넷 쇼핑으로 주문해놨던 목공용 전기톱 등 물품의 배송지였다. 고유정은 같은 날 인천의 한 가게에 직접 가서 사다리와 방진복, 덧신, 덮개 등도 추가로 샀다. 박 서장은 "시신을 2차 훼손하는 과정에서 혈흔이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벽면과 천장 등에 커버링(Covering) 제품을 붙이고 자신도 방진복을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후 지난달 31일 오전 3시 13분쯤 고유정은 훼손된 시신이 담긴 것으로 추정되는 종량제 봉투를 김포 아파트의 쓰레기 분리수거장에 버렸다. 경찰은 봉투의 행적을 쫓아 인천 서구의 한 재활용업체에서 뼛조각을 발견했다. 그러나 고열로 소각되고 3cm 크기로 남은 상태여서 피해자 시신인지를 가리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경찰은 현장에서 수거한 피해자의 머리카락을 감정하는데 1주일, 뼛조각은 3주가 소요될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지난 1일 고유정을 충북 청주의 자택에서 체포했다. 이날부터 고유정은 살해와 시신유기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거듭 "우발적 범행"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경찰은 계획범죄로 판단하고, 오는 12일 검찰로 사건을 넘길 방침이다.

◇ 범행 동기·수법은 여전히 물음표…경찰 "사이코패스는 아니다"
고유정의 혐의는 비교적 명확하게 밝혀졌으나 정확한 계획범행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경찰 측은 "고유정이 정신과 진단이나 치료를 받은 기록이 없고, 조사과정에서도 별다른 이상 징후가 없었다"며 정신질환자일 가능성도 낮다고 봤다.

고유정이 우발범죄를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실제 범행동기는 단정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다만, 고유정을 조사한 프로파일러들은 피해자인 전 남편의 존재로 인해 갈등과 스트레스가 계속될 것이라는 극심한 불안 때문에 범행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고유정은 경찰 조사에서 "피해자인 전 남편과 자녀 면접교섭으로 인해, 재혼한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깨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범행수법 역시 고유정의 진술이 없어 아직 추정 단계다. 피해자가 고유정보다 체격이 큰 상황에서, 고유정이 범행 전 수면제 성분을 사용해 피해자를 무력화했을 가능성에 경찰은 무게를 두고 있다.

피의자 고유정이 범행 사흘 전인 지난달 22일 제주시의 한 마트에서 흉기 등을 구매하는 모습이 CCTV에 찍혔다.

경찰은 또 펜션 내에 남아있는 비산(飛散) 혈흔 행태를 분석한 결과, 혈흔이 150㎝ 높이에서 시작해 계속해서 낮아졌다고 밝혔다. 피해자가 도망가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또 혈흔에서 방어흔은 있었지만 공격흔은 없었다는 점을 들어 피해자가 의식이 또렷하지 않아 공격할 수 없었던 상황으로 보인다고 추측했다.

고유정이 가족에 대한 애착을 보이면서도 아들이 있는 장소에서 범행을 저지른 이유도 밝혀지지 않았다. 고유정은 신상공개가 결정되자 "아들과 가족 때문에 얼굴 공개가 되느니 죽는 게 낫다"고 말하기도 했다.

경찰은 "사이코패스의 경우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는데 프로파일러의 조사 결과, 고유정은 가족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는 정황을 봤을 때 사이코패스는 아니라고 판단했다"며 "범죄 수법이 잔인하다고 해서 무조건 사이코패스인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경찰은 명확한 범행 동기 등을 규명하기 위해 사건을 검찰로 송치(送致)한 이후에도 증거를 보강하기 위한 수사를 계속할 방침이다. 제주~완도 해상 등에서 강씨의 시신 수색도 이어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