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든아홉 살인 한준식은 열다섯 살에 광복을 맞았다. 그가 말했다. "일제시대 그 시절의 혹독한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아무래도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해남에서 나고 자라 나랏일에 많은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 같다"고. 대신 그는 "부모님 사람을 듬뿍 받았고 형제들과 우애도 돈독했던지라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며 살았다"고 했다. 그 한준식이 1951년 8월 나이 스물에 군에 입대했다. 이후 기억들은 신산했던 일제 때보다 더욱 또렷하다. 6·25전쟁이다. 한준식은 1952년 강원도 김화전투 때 포탄 파편이 허벅지에 꽂혀 죽을 뻔했다. 치료 도중 한 달 만에 전쟁터로 복귀한 한준식은 입대 5년 2개월 26일 만인 1956년 11월 6일 제대했다. 한준식은 그 또렷한 기억을 대학노트에 빽빽하게 기록해놓았고, 그 기록이 '여든아홉이 되어서야 이 이야기를 꺼냅니다'(RHK 출판)라는 책으로 나왔다.

한준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적은 중화인민공화국 제12군 예하 35사단이다. 명에서 청으로, 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거듭 바뀐 이 중국은 근대사 속에서 한국 역사를 바꾸려고 끝없이 시도했다. 때로는 성공했고 때로는 실패했다. 조선 간섭이 대성공을 거둔 사건이 바로 6·25전쟁이었다. 100년 전 구한말 기록과 노인의 기록에서 집요한 중국 간섭 전말기(顚末記)를 읽어본다.

임오군란에 개입한 중국

1840년 청나라를 상대로 영국이 전쟁을 선포하고 2년 뒤 승리했다. 아편전쟁이다. 유사 이래 셀 수 없이 벌어진 전쟁 중 하나이지만, 아편전쟁은 의미가 달랐다. 중국 황제 천자(天子)가 좌지우지하던 '천하(天下)'가 붕괴되고, 청나라는 하고많은 나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폭로된 사건이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앞에는 독립문이 서 있다. 1897년 청나라로부터 독립 의지를 밝힌 문이다. 그 앞에 있는 돌기둥은 명·청 사신이 올 때 조선 국왕이 나가 마중을 하던 영은문 주춧돌이다. 독립문 옆에는 국왕이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이 있었다. 모화관은 독립문 건립과 함께 독립협회 사무실로 바뀌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일본에 조선을 빼앗겼던 중국은 1950년 6·25전쟁 때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 현대사를 결정적으로 뒤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1882년 7월 23일 조선 수도 한성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조선 국왕 고종은 북경에 출장 중이던 김홍집과 어윤중에게 전보를 보내 청군 원병을 요청했다. 고종과 왕비 민씨에게는 권력을 잃을 위기를 타개할 비책이었고, 천하를 잃은 중국에는 조공국인 조선을 실질적으로 속국으로 만들 수 있는 호기였다.

8월 10일 정여창이 지휘하는 중국 해군 북양수사(北洋水師) 함대 3척이 인천항에 도착했다. 열흘 뒤 군함 5척으로 구성된 또 다른 함대를 타고 병사 3000명이 경기도 화성 마산포에 도착했다. 10일 입항한 마건충은 26일 흥선대원군을 납치해 밤샘 행군 120리 끝에 마산포에 도착해 대원군을 천진으로 끌고 갔다.

청군은 철군하지 않았다. 세상을 회천(回天)시킬 호기를 버릴 수 없었다. 스물세 살짜리 야심만만한 장군 원세개(袁世凱)가 가마를 타고 궁궐을 들락거리며 10년 넘게 조선을 통치했다. 그때 한성에 있던 서양 외교관들이 항의해도 요지부동이었다.(호러스 알렌, '근세한국외교사 연표') 이게 중국이 전통적인 점잖은 조공 시스템을 부수고 무력으로 조선을 식민지화한 첫 케이스다. 이후 12년 동안 조선 정부는 말 그대로 그 어떤 개혁도 하지 않고 세월을 보냈다. 그래서 초대규모 민란이 터졌다. 동학혁명이었다.

동학혁명에 개입한 중국

한준식이 보관하고 있는 제대증. 일제강점기 태어나 6·25전쟁 때 입대해 김화전투에서 중공군에 맞서 싸운, 여든아홉 먹은 역사가 담겨 있다.

1894년 남도에서 일어난 농민들이 군사를 일으켰다. 5월 10일 황토현에서 농민군에 참패한 관군 사령관 홍계훈은 "청나라 군대가 필요하다"고 거듭 보고했다. 보고서에는 농민이 제거하려는 폭정 우두머리 이름도 적혀 있었다. 선혜청장 민영준이다. "비적들은 민영준을 축출해 정사에 간섭하지 못하게 한다면 모두 귀순할 것이요 그러지 않는다면 몸이 갈라지고 뼈가 부서지더라도 영원히 해산하지 않겠다고 한다."(주한일본공사, '일청양국군 내방에 따른 국내외 탐정보고' 1894년 6월 12일)

보고서를 읽은 민영준은 즉각 원세개에게 찾아가 군사를 요청했고 6월 7일 청군 1500명이 조선에 도착했다. 동시 출병을 하기로 한 일본군도 조선으로 출병했다. 동학혁명군은 자진 해산했다. 6월 17일 밤 민영준이 원세개를 찾아가 이렇게 치사했다. "미친 벌과 궁한 개떼(狂蜂·窮狗: 농민군을 가리킨다)가 흩어진 것은 오로지 천병(天兵)이 왔기 때문이니, 모두 대인 덕택이다." 6월 23일 영돈령부사 김병시가 고종에게 일갈했다. "어찌 이런 나라가 다 있는가!" 고종이 이리 대답했다. "참으로 그렇구려!"('갑오실기' 음력 5월 20일) 그해 8월 일본과 청이 아산만에서 맞붙었다. 청일전쟁은 청의 참패로 끝났다. 조선은 이제부터 일본 지배를 받게 되었다. 식민 지배 25년째 되던 해 전남 해남에서 한준식이 태어났다. 해방이 되고 전쟁이 터졌다.

한준식의 입대와 김화전투

1951년 8월 한준식이 입대했다. 광주 제5015부대에서 일본군이 버린 구식총으로 사격술과 잠복술을 몇 시간 배우고 실전에 투입됐다. 이듬해 2월 기갑연대 소속으로 지리산 전투에 투입돼 싸웠다. 그리고 한준식 부대는 김화전투에 투입됐다. 포성이 끊임없었고 흙먼지에 뒹굴다 온 듯한 다국적 유엔군이 오갔고 부상자도 어마어마하게 실려나왔다. 배가 고프면 말똥에 떨어진 강냉이를 냇물에 씻어서 먹었다.

어느 날 밤 8시 중공군 포격이 개시됐다. 한준식은 그 폭음과 총성, 3분 정도씩 이어지는 정적을 잊을 수 없다. 10월 5일 새벽 한준식은 머리카락과 손발톱을 넣고 소속 부대와 집 주소를 적은 봉투를 제출하고 난초고지로 출전했다. '총알 몇 방 맞고 죽으면 행운이었다. 포탄에 맞은 이들은 공중에서 산산조각 부서졌다. 머리, 다리, 몸통, 창자가 갈기갈기 찢어져 나뒹굴었고 바닥에는 핏물이 흥건했다.'

중공군은 나팔과 피리, 꽹과리를 두드리며 개미떼처럼 쳐들어왔다. 소대장이 명령했다. "죽든 살든 조국을 위해 용감하게 싸우자." 잠시 뒤 소대장이 목멘 소리로 명령을 변경했다.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제군들은 꼭 살아야 한다."

한준식이 대학노트에 그려놓은 6·25 김화전투 장면. 한준식은 "1개 중대 병력이 다 전사하고 전우 30명이 독립고지에서 완전 전몰했다"고 기록했다. 6·25전쟁은 1882년 임오군란 이래 끝없이 조선 속국화를 시도해온 중국이 결정적으로 조선 내정간섭에 성공한 사건이었다.

인근 독립고지로 이동했을 때 예광탄이 솟고 포탄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왔다. 아군은 서른 명이 남았고 중공군은 바다 같았다. 순간 포탄이 터지고 한준식은 쓰러졌다. 일어나니 새벽 하늘에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소대장 명령이 생각났다. "죽지 말고 꼭 살아야 한다." 그래서 살았다. 기어서 탈출해 후방으로 후송됐다. 그가 속한 11중대원은 전원 전사했다. 한준식은 전후 3년 뒤인 1956년 만기 제대했다.

중국의 또 다른 내정 개입, 6·25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됐다. 1950년 7월 2일 주은래는 소련대사 로신에게 "미군이 38선을 넘을 경우를 대비해 심양에 병력 12만 명이 대기 중"이라고 밝혔다.(김동길·박다정,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후 및 한국전쟁 초기 중국의 한국전쟁과 참전에 대한 태도 변화와 배경', 2015) 닷새 뒤 중국은 4개 군단과 3개 포병사단으로 '동북변방군'을 조직했다. '인민일보'에 따르면 중국은 북한에 조선 지도와 조선인민군 군복 견본 제공도 요청했다.(김동길 등, 위 논문) 7월 5일 김일성은 평양 주재 소련 대사 슈티코프를 통해 "승리에 대한 확신을 위해" 중국군 파견을 요청했다. 7월 12일 모택동은 북한군 부총참모장 이상조에게 "32만 명 4개 군단이 준비돼 있다"고 밝혔다.

8월까지 북한군은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했다. 8월 26일 주은래는 "이승만을 단번에 몰아내고 조선을 신속히 해방하고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동북변방군을 조직했음에도 이를 사용하지 못했다"고 후회했다.

9월 15일 UN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9월 21일 UN군이 서울을 수복했다. 사령관 맥아더는 10월 1일 김일성에게 무조건 항복 통첩을 보냈다. 그날 김일성은 모택동에게 출병을 공식 요청했다. 10월 5일 중국 공산당 정치국회의가 열렸다. 모택동이 선언했다. "조선과 소련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데 우리만 안 나가면 어찌 되는가!" 출병이 결정됐다. 팽덕회가 사령관으로 선정됐다.(김동길,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원인 연구', 2016)

10월 8일 UN군이 38선을 넘었다. 그날 모택동은 "영광의 승리를 쟁취하라"고 선언했다.(박영실,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과정과 중조연합사령부의 구성', 2008) 10월 19일 UN군이 평양을 수복했다. 그날 중국군이 압록강을 도강해 북한 영내에 잠입했다. 연합군이 신의주를 제외한 북한 전역을 점령하던 10월 25일, 30만 중국인민지원군이 사격을 개시했다.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는 분단된 채 갈등 중이다. 1882년 고종이 불러들인 원세개는 1894년까지 12년 동안 조선을 엉망으로 만들어놨다. 청나라 치하에서 조선은 비상식적인 정체와 부패에 허덕였다. 56년 뒤 김일성이 불러들인 중화인민공화국은 한국의 미래를 압살해버렸다. 1950년 10월 13일 모택동이 주은래에게 말했다. "적이 압록강까지 오면 국내외 반동 세력의 기세가 높아진다." 북한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 사회주의 혁명을 지키기 위해서 참전한다는 것이다.(김동길, 위 논문)

영은문, 한준식 그리고 독립

1895년 조선왕조 내내 국왕이 중국 사신을 영접했던 영은문이 헐렸다. 2년 뒤 독립협회는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청으로부터, 나아가 일본으로부터 자주국임을 천명하는 문이었다.(서대문구 공식 블로그에는 국왕이 사신과 차를 마시던 모화관을 '임금님 응접실'이라고 적어놓았다. 한심하다.)

문을 헐어버린다고 독립이 오는가. 아니었다. 싸워야 한다. 싸우지 않아서 조선은 식민지가 됐다. 훗날 압살된 미래를 되살리기 위해 남쪽은 죽기 살기로 싸웠다. 북쪽은 저 모양 저 꼴이다. 나라를 지킨 한준식은 조선소에서, 행상으로, 목수로 일하며 가족을 먹여 살렸다. 그가 말한다. "정신적인 무장을 단단히 해 본인 스스로부터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목포에 사는 여든아홉 먹은 소시민 한준식의 삶에 중국이 미친 영향에 관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