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숙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 비준을 통상 마찰에 얹어 재촉하는 목소리가 드세다. ILO 핵심 협약은 노동기본권에 대해 ILO가 제시한 기준이며, 이를 지킬 것을 국가로서 약속하는 것이 비준이다. 우리는 현재 핵심 협약 8개 중 결사의 자유와 강제노동 금지에 관한 4개를 아직 비준하지 않고 있다. 제목이야 극히 지당해 보이지만 개별 협약으로 들어가면 우리 노사관계 토양에서 쉽게 판단하거나 청산하기 어려운 내용이 대부분이다.

현재 노동계는 한·EU FTA에 따른 보복이 예상되니 하루빨리 비준해야 한다며 재촉하지만, 사실 그렇게 연결시킬 문제는 아니다. 국가 간 분쟁과 관련된 만큼 FTA 위반 여부의 판단과 후속 조치 관련 사항은 협정서에 명확히 규정돼 있는데, 노동 문제는 이러한 통상 분쟁과 궤를 완전히 달리하기 때문이다. 한·EU FTA 협정서상, 우리 정부는 ILO 핵심 협약 비준을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했을 뿐이며, 사실 그간의 노력이 적지 않다. 설령 EU 측이 '노력하지 않았음'을 입증했다며 분쟁 해결 절차에 돌입한다 해도 전문가 패널 소집과 그로부터의 권고안 제시가 그 절차의 종료 지점이다.

그렇다고 사안이 가볍다는 뜻은 아니다. 국제적 평판과 정치적 차원에서 상당한 부담 요인임에 틀림없다. 이 문제의 지형을 냉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EU와 ILO의 압박이 국내 노동계와 연계된 고도의 정치적 행위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각국의 근로자 조직과 ILO, EU 의회 내의 사민당 계열은 조직 근로자의 이해를 증진시킨다는 목표를 공유하고 연대한다.

이는 지금 이들이 압박하는 내용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 핵심은 유럽 선진국 스스로도 아직 명확한 방향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한국에 대해서는 국내 노동계 주장을 단호하게 편드는 내용이다. 일례로, 대리기사 등 특수형태 근로자들의 노조 활동은 국내 노동단체 세력 확장을 위한 숙원이지만, 근로자성과 개인사업자성을 동시에 가진 이들의 특성이 플랫폼 기술 발전과 함께 어떻게 진화할지는 신중한 관찰이 필요한 부분이다. '결사의 자유' 차원이 아닌 '사업자 간 담합'으로 간주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난 9일 ILO가 '선비준 후입법'을 한국 정부에 공개 제안한 것 역시 이례적이다. ILO는 그간 비준과 국내법 개정 간의 순서는 각국이 정할 사안이라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사실 관련법 정비 없이 국제법에 준하는 비준이 선행됐을 때의 혼란은 온전히 각국의 몫인데 국외자가 뭐라 할 문제가 아니다.

ILO나 EU의 이런 대담한 행보는 우리 사정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데다, 우리 노동계의 적극적인 국제 홍보 내용이 그들의 이해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본인들의 이익을 위해 열심인 것을 비난할 일은 아니지만, 그간 관련 국제회의에 참석했던 전문가들은 노동단체를 통해 국제사회에 전달된 정보들이 의도적으로 제도 개선 상황을 업데이트하지 않았거나 편향됐다는 점을 빈번히 지적해왔다. 즉, 국내 사정을 균형 있게 알리고 설명했어야 할 정부가 상황을 방치하고 회피한 것이 외압을 불러들인 측면도 크다.

국가 주도 경제발전 속에서 우리 노사관계가 경제 수준에 비해 턱없이 낙후됐다는 데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전투성을 제일의 자랑으로 삼는 노조와 교섭 당사자로서의 인식마저 희박한 채 정부 뒤에 숨어온 사용자 간의 성숙하고 합리적인 관계는 아직 요원하다. 그러나 서구와 우리가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 자체에 당당하지 못할 이유 또한 없다. 더구나 우리 노동법은 한쪽에만 유리한 구조가 아니다. 단결권 측면에서는 근로자의 권리가 좁게 설정된 반면,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에 있어서는 근로자 권한이 남용될 여지가 크다. 각 단계가 엉키고 비틀렸는데, ILO가 주장하듯 단결권과 교섭 범위를 근로자에게만 유리하게 확대하는 것이 적대적 노사관계를 진전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 믿기 어렵다. 더구나 협약이 일단 비준되면, ILO는 많은 사안에 감독 권한을 행사하며 국내 문제에 당당하게 개입하게 된다. 이들이 불편부당하지 않을진대, 지금과 같은 문제를 안은 상태에서 각종 분쟁과 사법적 판단에 어떤 혼란과 왜곡이 초래될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니 비준을 최상위 목표로 삼아 밀어붙이는 것은 무책임하고 위험하다. 중요한 것은 비준 이후에도 혼란이 없도록 준비해 발전의 계기로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한 최우선의 과제는 협약 관련 내용의 앞단과 뒷단을 모두 살펴 균형 잡힌 노동법 개정안을 마련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