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5·18을 다르게 볼 수가 없다."(문재인 대통령, 18일 제39주년 5· 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이 정부의 좌파 독재가 막바지에 다다랐다."(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 지난 17일 대전 장외집회에서)

여권과 자유한국당이 총선 11개월을 앞두고 '독재(獨裁)'를 둘러싼 '프레임 전쟁'을 시작했다. 문 대통령은 18일 광주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최근 한국당 일부 의원들의 '5·18 폄훼' 발언을 겨냥한 듯 "아직도 5·18을 부정하고 모욕하는 망언들이 거리낌 없이 큰 목소리로 외쳐지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부끄럽다"고 했다. 반면 황 대표 등 한국당에선 현 여권을 향해 "좌파 독재"라 공격하며 내년 총선을 '반(反)좌파 포퓰리즘'으로 치르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정치 분석가들은 "여야가 서로를 '과거' 프레임에 가두고 자신들을 '미래'로 설정하기 위한 전선(戰線)을 짜고 있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지난 18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가운데,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 등이 앉아 있다.

◇"친일·군부독재·적폐" vs "친북·좌파독재·무능"

문 대통령은 올 3·1절 기념사에서 "해방된 조국에서도 일제 경찰 출신이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았다"며 "정치 경쟁 세력을 비방하는 도구로 변형된 '빨갱이'와 '색깔론'은 하루빨리 청산할 친일 잔재"라고 했다. 국가보훈처도 3월 13일 문 대통령에게 한 서면 업무보고를 통해 기존 독립유공 서훈자 1만5180명의 공적(功績)을 전수 조사해 친일 행위 등이 확인되면 서훈을 취소할 방침이라고 했다.

한국당 쪽에선 여권의 이런 움직임을 내년 총선을 겨냥한 '친일(親日)' 프레임 짜기로 보고 있다. 한국당을 '친일 세력' 프레임에 가둠으로써 청산 대상으로 모는 효과를 노린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지난 3월 "국가보훈처가 과거와의 전쟁을 확대하고 있다. 해방 후 반민특위로 국민이 분열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이라고 반발한 것도 이런 시각을 반영한 것이란 말이 나온다. 하지만 이런 나 원내대표 등을 향해 여권에선 '토착왜구' 프레임을 들고 나오며 공세를 강화했다. 여권 일각에서는 "내년 총선은 한일전"이라고도 했다

한국당 일부 의원의 '5·18 폄훼' 발언 논란으로 '군부독재 후예' 프레임도 다시 등장하는 모양새다. 최근 민주당에서 한국당을 향해 "5·18에 책임 있는 민정당의 후신"이라며 공세를 강화한 데 이어 이어 5·18 기념식에서 문 대통령이 '독재자의 후예'를 거론하면서 군부 독재 프레임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정치권 관계자는 "'친일' ''군부독재' 모두 여권에서 문재인 정권의 정체성으로까지 거론하는 '적폐청산' 프레임이란 울타리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했다.

탄핵 정국 이후 현 여권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한국당도 지난 2월 황교안 대표 체제 등장 이후 프레임 반격에 나섰다. 작년 한해 여론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던 현 정권의 대북정책이 타깃이 됐다. 작년 세차례 남북 정상회담과 한차례 미·북 정상회담으로 물꼬를 텄던 북한 비핵화 협상이 올해 들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다. 여권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나경원 원내대표가 지난 3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문 대통령을 향해 "김정은의 수석대변인이란 소리를 듣게 해선 안 된다"고 발언하자, 여권에선 '좌파 빨갱이'' 프레임이라고 반발한 게 대표적이다.

한국당은 여권이 지난달 한국당을 제외한 야3당과 선거제 개편안,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법안, 검경수사권조정안의 패스트트랙 지정을 강행하자 '좌파 독재' 프레임을 들고 나왔다. 황 대표는 지난달 20일 광화문에서 첫 장외집회를 열며 "이 정권의 좌파독재가 끝날 때까지 결코 투쟁을 멈추지 않겠다"고 했다. 이후 전국 순회 장외 집회에서는 '좌파 독재 중단'이라는 구호가 빠지지 않고 있다.

'경제 무능' 프레임은 현 정부가 역점적으로 추진한 최저임금 급격 인상 등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공격하는 프레임으로 등장했다. 소득부문 가계동향조사나 고용동향 등의 지표가 악화되면고 지난달 말 1분기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이 발표된 뒤 더 자주 거론되고 있다.

◇선거 가까워질수록 프레임 전쟁 더 격렬해질 듯

프레임 이론이란 기본 틀, 뼈대란 의미의 프레임을 따 정치·사회학적 인지구조의 틀의 힘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조지 레이코프 교수가 발표했다. 전략적으로 잘 짜인 프레임을 제시해 대중의 사고 틀을 먼저 규정해내는 쪽이 정치적인 승리를 맛보며, 이를 반박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프레임을 강화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문 대통령이 5·18 기념사에서 말한 '독재자의 후예''는 한국당을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비극을 책임져야 할 사람을 옹호하는 세력으로 규정하는 프레임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반면 황 대표가 말하는 '좌파 독재'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 등 남미(南美) 국가들의 경제 상황을 궁지로 몰아넣은 좌파 포퓰리즘 지도자들을 연상시킨다.

이런 프레임 공방은 역대 선거 때마다 등장했다. 2002년 대선 때 현 여권의 새시대를 내건 '정치개혁' 프레임이, 2007년 대선 때는 '잃어버린 10년'을 내세운 현 야권의''경제성장' 프레임이 효과를 발휘했다. 지난 대선 때는 '국정농단' '적폐청산' 프레임이 압도적 힘을 발휘했다.

미국의 보수·우파 논객 벤 샤피로는 2014년 출판한 소책자 '좌파와 논쟁하고 그들을 격파하는 법(How to debate leftiests and destroy them)'에서 미 좌파 인사들이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을 '인종주의자 '성차별주의자' 등의 표현으로 인격적으로 비난한다면서, 이를 '왕따 전술'이라고 규정했다. 샤피로는 이같은 과정에서 생기는 도덕적 우월감이 좌파 정체성을 만든다고 했다. 이런 차원에서 적폐 청산 프레임으로 한국당을 코너에 몰았던 현 여권은 내년 총선에서도 '도덕성 프레임'을 통한 공격에 치중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이에 맞서 한국당 역시 현 정권 고위공직자나 그 후보자들의 재산, 성(性) 관련 논란들을 부각시키며 도덕성의 문제를 강하게 파고들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정치권의 프레임 전쟁은 '말'의 확산을 통해 유권자 '인식'의 변화를 유도하려는 싸움이다. 그러므로 말의 확산 속도와 파장을 엄청나게 키운 소셜미디어 확산으로 프레임 싸움은 더 격렬해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인터넷과 모바일 기기로 연결된 다양한 플랫폼 상에서 말은 눈덩이처럼 힘을 불리기 때문이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프레임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간단명료하고 국민이 단어만 들어도 공감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라며 "국민들은 처음에는 '독재'나 '무능'이라는 프레임에 의문을 갖다가도 계속되면 점점 자기도 모르게 동화되는 과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년 총선까지 양측의 프레임 싸움이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통화에서 "여야가 대립과 분열의 정치를 강화시키는 것은 이른바 적대적 공생의 관점으로 볼 수 있다"며 "최근 무당파가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데, 민주당과 한국당으로서는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