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초적 본능’에서 캐서린 트라멜(샤론 스톤)은 형사 닉의 집에서 송곳으로 능숙하게 얼음을 깬다. 이제 얼음은 쓰임새에 따라 가공돼 가정에서 송곳을 쓸 일은 없다. 그러나 프로의 세계에서는 송곳이 여전히 유효하고, 얼리는 시간에 따라 역할을 달리한다. 전문가는 “얼음이 술의 맛을 지켜주는 시간은 10분”이라고 한다. 앞으로 위스키 등 독주를 ‘온 더 록스’로 마실 때 10분 이내로 마셔서 바텐더에게 예의를 차리는 것은 어떨까.

담배를 끄는 남자의 등 뒤에서 여자는 헤아리기 어려운 미소를 짓는다. 얼핏 행복해서 짓는 것 같지만 알 수 없는 감정이 한 켜 더 깔린 듯 보인다. 둘은 다시 격정적 사랑을 나누고, 사람보다 음악이 먼저 절정으로 치닫는 가운데 시선이 침대 밑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그러다가 마룻바닥에 놓인 얼음송곳에서 멈춘다.

'원초적 본능'은 말 그대로 돌풍이었다. 1992년 개봉 당시 서울 관객 100만 동원으로 최고 흥행 외화 자리에 올랐고, 어떤 장면은 조금 과장을 보태 인류 역사에 영원히 남았다. 몇몇 용감한 급우가 교복 차림으로 극장에서 보고 나왔다는 무용담도 돌았건만, 당시 고등학생이던 나는 2006년이나 되어서야 대폭 할인이 들어간 DVD로 '원초적 본능'을 보았다. 자기 소설로 알리바이를 깔아 놓는 작가 캐서린(샤론 스톤 분)과 직업 정신과 집착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건 담당 형사 닉(마이클 더글러스 분), 세월 속에서 그 둘 모두와 닿아 있는 범죄 심리학자 베스(진 트리플혼 분)가 자아내는 역학 관계가 몇 겹의 모호함으로 영화를 둘러싼다. 그런 모호함이 아이러니하게도 긴장감을 자아내는 가운데, 범죄 도구인 얼음송곳만이 그야말로 '주머니 속 송곳'처럼 거의 유일한 명료함으로 존재감을 빛낸다.

물론 송곳에 알리바이가 없는 건 아니다. 본업인 얼음 쪼개기 말이다. 살인 무기로 남용되느라 바쁜 가운데서도 엉겨 붙은 얼음을 술잔에 채우기 좋게 쪼개준다. 송곳을 다루는 손놀림이 거침없지만 보고 있노라면 걱정을 안 할 수는 없다. 저러다가 얼음이 미끄러지면 송곳이 손에 박힐 수도 있을 텐데.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원초적 본능'이 개봉된 지도 올해로 27년, 걱정 또한 유효기간이 끝났다. 이제 얼음은 웬만해서 쓰임새에 따라 미리 가공되어, 즉 크기와 모양을 갖춰 쓰임새를 찾아간다. 적어도 가정에서는 엉겨 붙은 얼음을 쪼개느라 송곳을 갖춰놓고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어졌다.

영화 ‘원초적 본능’에서 캐서린이 송곳을 이용해 얼음을 쪼개는 장면.

물론 프로 세계라면 이야기가 사뭇 다르다. 맞춤 가공한 얼음을 쓰더라도 송곳 자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 한편으로는 고대 문명의 제의에서 썼다는 칼처럼 의식 혹은 상징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 원하는 모양과 크기로 얼음 가공이 가능한 시대이지만, 바텐더라면 큰 얼음에서 덩이를 떼어 내 다듬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떼어 내는 단계에서 송곳이, 이후 다듬는 단계에서는 과도처럼 날이 좁고 긴 칼이 쓰인다. 칵테일이라면 정육면체 얼음을 쓰지만, '온 더 록스(on the rocks)', 즉 위스키 등의 독주에 얼음만 더해 마시는 경우라면 요즘은 어원('바위 위에')과 달리 완전한 구형 얼음을 쓴다. 같은 부피여도 육면체보다 표면적이 작으므로 얼음이 천천히 녹아 온도는 내려주지만 맛은 급격히 옅어지는 것을 막아 주기 때문이다. 요즘은 한술 더 떠 다이아몬드, 특히 가장 전형적인 형태의 '라운드 브릴리언트' 컷과 흡사하게 깎아내기가 특히 일본에서 다음 단계의 기예처럼 통하고 있다.

천천히 녹기. 음료 특히 주류 세계에서 쓰이는 '프로의 얼음'이 갖춰야 할 첫째 자격이다. 물만 얼리면 얼음이 되니 그게 그거라고 속단하기 쉽지만, 프로와 아마추어 얼음 사이에는 크레바스만큼이나 깊은 품질의 골이 존재한다. 가정 냉장고에서 얼린 얼음은 빨리 얼린 탓에 무르다. 냉국이나 아이스커피 등 음식이나 음료에 더하자마자 와작 소리를 내며 깨지는 것도 어는 속도와 그에 비례한 무름 탓이다. 깨지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후 얼음은 제 역할을 못한다. 음료든 음식이든 온도는 내려가지 않고 맛만 옅어진다. 빨리 어는 대신 단단함을 포기한 대가다.

반면 프로의 얼음은 단단하다. 워낙 크게 얼리므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지만, 서두르면 제 무게를 못 이겨 무너진다. 그래서 기본 24시간, 길게는 72시간 이상 얼리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얼음을 천천히 얼리면 단단함은 물론 투명함 또한 얻을 수 있다. 얼음은 바깥에서 안으로 얼어 들어가기 때문에 빨리 얼리면 가운데로 미네랄이나 불순물이 모여 탁해진다. 프로 세계에서는 음료의 아름다움이 떨어지므로 이런 얼음은 불합격이다. 속까지 맑은 얼음이어야만 잔에 음료와 함께 담았을 때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자기 역할을 한다.

높이 110, 너비 55, 깊이 26센티미터. 국내 유일의 전문 가공 업체 '아이스팜'의 냉동고에서 가공을 기다리는 큰 얼음, '대빙'의 크기이다. 아이스팜의 정준양 대표는 휘발유와 얼음을 함께 소매로 팔다가 우연한 계기로 칵테일용 얼음 가공의 길로 들어섰다. '가공 전문 업체'라 했듯 아이스팜에서 얼음을 직접 얼리지는 않는다. 제빙은 단열부터 기계까지 규모며 설비가 가공보다 훨씬 더 집약적이어야 하므로 의욕은 있지만 아직까지는 구상 중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래서 의정부의 업체와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대빙을 받아다 가공 및 포장해 카페나 바 등에 납품한다. 서울 및 경인 지역은 열쇠를 받아 바가 문을 닫는 오전에 배달하고, 부산이나 제주도에서도 정기적으로 냉동 탑차를 몰고 와 가져간다고 했다.

집에서 가장 편하고 만족스럽게 쓸 수 있는 얼음은 무엇일까? 정준양 대표는 사기 쉽고 단단해 잘 녹지 않으니 편의점 돌얼음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답했다. 다만 부순 얼음이라 모양도 크기도 균일하지 않으니, 정육면체를 찾는다면 마트 등에서 파는 '칵테일 얼음'도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얼음이 아무리 천천히 녹더라도 칵테일을 무한정 두고 마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스팜의 얼음을 쓰는 바 가운데 한 군데인 '팩토리'의 박시영 마스터 바텐더는 "종류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로 십 분 이내"가 최적이라고 밝혔다. 마시는 이 마음일 수는 있겠지만 잔을 받아 벌컥벌컥 '원샷'해도 맛을 느끼기 어렵고, 십 분이 지나면 단단한 얼음이라도 많이 녹아 바텐더가 의도한 맛이 더 이상 나지 않기 때문이란다. 레스토랑, 비스트로, 카페 등 외식 공간 가운데서도 바가 기본적으로 내포하는 바텐더와 손님 사이의 상호 존중 문화를 헤아린다면 '십 분 이내'쯤은 지켜주는 게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