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차세대 원전 ‘APR1400’이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미국 원자력 규제기관에서 설계인증서(DC)를 취득했다. 원전 기술 종주국 미국으로부터 한국형 원전에 대한 기술력과 안정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미 원자력규제위원회(NRC)는 지난달 30일(현지시각) "한국전력과 한국수력원자력이 2014년 12월 제출한 APR1400에 대해 더 이상 기술적 이슈가 없어 신속한 법제화 절차를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올 7월 말에는 법제화 과정이 마무리 돼 법률안이 최종 공표될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한국 원자력 산업이 해외에선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인정받는데, 정작 국내에서는 탈원전으로 홀대받는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정용훈 카이스트 교수(원자력·양자공학과)는 "우리 원전 산업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전성기를 맞은 상황에서 정부가 탈원전을 추진하는 것은 스스로 원전 선두주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며 "생다리를 잘라내는 것과 같다"고 했다.

신고리 3·4호기 전경.

◇ 한국 원전 ‘APR1400’ 美 원자력규제위 인증...외국기업으론 최초

APR1400이 미 원자력규제 당국의 설계인증을 받은 것은 외국 기업이 개발한 원전으로는 처음이다. 지금까지 NRC가 원자로 사용을 인증한 것은 웨스팅하우스와 GE가 신청한 5건이 전부였다. 미국 외 다른 국가에서도 NRC의 설계인증을 받은 원전은 안전하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원자력 업계는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수출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다고 허탈하다는 반응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6월 고리 1호기 영구 정지 선포식에 참석해 "원전 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원전 중심의 발전정책을 폐기하고 탈핵시대로 가겠다"며 "새 정부는 탈원전과 함께 미래에너지 시대를 열겠다"고 밝혔다. 정부의 방침에 따라 한수원 이사회는 지난해 6월 월성 1호기 조기 폐쇄와 신규 원전 4기 사업 백지화를 결정했다. 신한울 3·4호기는 공사가 중단된 상태다.

정동욱 중앙대 교수(에너지시스템공학부)는 "NRC는 매우 권위 있는 기관으로, 프랑스 아레바와 일본 미쓰비시도 설계인증을 받으려다 실패했다"면서 "원전 기술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는데 (국내에선)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니 허탈하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하얀 아랍에미리트(UAE) 왕세제가 올 2월 청와대에서 열린 한·UAE 정상회담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 탈원전 국가에 원전사업 맡길 나라 있을까?

문 대통령은 지난달 카자흐스탄을 국빈 방문해 실권자인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에게 "한국은 40년간 원전(원자력발전소)을 운영해 오면서 높은 실력과 안정성을 보여줬다"며 "(카자흐스탄 원전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한다"고 했다.

올 2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도 인도의 원전 건설 사업 참여 요청에 "기회를 달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안드레이 바비시 체코 총리와의 회담에서 "한국은 24기의 원전을 운영 중인데 지난 40년간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대통령까지 나서 해외 원전 세일즈에 나서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빈손일 수 밖에 없는 것은 탈원전 정책의 영향이 크다고 지적한다. 에너지업계 관계자는 "탈원전을 하게 되면 원전 산업이 망가지고 경쟁력도 저하될텐데, 앞으로 수십년의 원전 유지보수를 생각하면 누가 한국에 원전 건설을 맡기겠느냐"고 말했다.

정용훈 교수는 "탈원전을 추진하면 설사 수출이 이뤄져도 국내에서 산업·공급망이 무너지고 가격경쟁력도 떨어질 것"이라면서 "한국이 원전 수출에 다급하다는 것을 상대국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가정하면 제대로 된 가격을 받고 수주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정동욱 교수는 "APR1400이 웨스팅하우스 등 해외 기업과 협업해 미국 시장에 진출할 가능성도 있다"면서도 "우리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는 탈원전 정책은 중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