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도중 잠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가 싶더니 스페인 디자이너 하이메 아욘(45)이 바로 이거라는 듯 한국어로 말했다. "역사와 놀다!" 서울 통의동 대림미술관 '하이메 아욘, 숨겨진 일곱 가지 사연' 개막 하루 전인 지난달 26일, 전시작 '토너먼트'에 대해 이야기하던 참이었다. 트래펄가 해전이라는 역사적 소재에 위트를 더했다는 개념을 한국어로 표현해보려고 번역기를 돌린 그는 "제대로 말한 거 맞느냐"며 웃었다.
토너먼트는 지난 2009년 영국 런던 트래펄가 광장을 거대한 체스판으로 바꿔버린 작품이다. 익살스러운 그림으로 장식한 2m 높이 체스 말 32개를 광장에 설치했다. 이곳은 1805년 영국이 스페인·프랑스 연합 함대를 격파한 트래펄가 해전을 기리는 장소. 자기 나라(스페인)가 진 전쟁을 희화화한다는 혹평도 들었다. 정작 그는 "내가 어떤 식으로 아이디어에 접근하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했다. "전쟁엔 싸움과 전략, 승리가 있습니다. 그럼 런던엔 뭐가 있죠? 킹(왕), 퀸(여왕), 타워(탑), 비숍(주교)…. 이걸 다 아우르는 게 뭘까요? 체스입니다."(킹·퀸·비숍 모두 체스 말의 이름이고 타워는 탑 모양 말 '룩'의 별칭이다.)
아욘은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의류회사 베네통의 디자인 연구센터인 '파브리카'에 입사하면서 디자이너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사진·영상·그래픽·디자인·패션·음악 등 분야 간 융합을 중시하는 파브리카의 철학은 틀에 얽매이지 않는 아욘의 작품 세계와 일맥상통한다. 2001년 자신의 스튜디오를 열고 가구회사 BD바르셀로나·프리츠 한센, 크리스털 회사 바카라 등과 협업했고 영국 데이비드 길 갤러리, 네덜란드 그로닝거 미술관 등에서도 전시를 열었다. 자신을 "디자이너이자 예술가"라고 소개하는 그는 "작업하면서 그것이 디자인인지, 예술인지, 설치물인지 규정짓지 않는다"고 했다. 타임지는 2007년 그를 스타일·디자인 분야 '선지자(visionaries)' 25인 중 하나로 선정했다.
아욘의 디자인은 위트로 가득하면서도 완벽주의라는 토양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어 부박하지 않다. 아욘은 "시리어스 펀(serious fun·진지한 즐거움)"이라고 표현했다. "유머를 위한 유머가 아닙니다. 웃음을 주는 한편으로, 사람들이 제품이나 공간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발견하도록 사려 깊게 이끌 수 있어야 좋은 디자인이죠." 그런 디자인을 위해 "가장 좋은 재료를 사용하고 마지막까지 품질에 완벽을 기해야 한다"고도 했다. 전시에 나온 크리스털 화병(花甁) 시리즈의 정교한 만듦새를 바라보노라면 그 말의 의미를 실감하게 된다.
일상 모든 순간이 영감의 원천이다. 그는 "스케치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머릿속이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다"고 했다. 인상적인 장면을 사진 찍어 인스타그램에도 부지런히 올린다. 과거 몇 차례 서울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도 여러 장이다. 성북동 가구박물관에서 본 십장생 굴뚝, 이태원 의류 매장, 다가구 주택촌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관찰했다. 아욘은 "서울은 전통과 현대가 혼합된 독특한 도시"라고 했다.
판타지 세계를 여행하는 듯한 이번 전시는 한국 첫 개인전이다. 전시장을 주제별로 7개 방으로 나누고 가구, 소품, 회화, 조각 등 140여점을 선보인다. 마지막 일곱 번째 방에는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한 설치 작품 '그림자 극장'이 마련됐다. 11월 17일까지. 1만원. (02)720-06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