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를 자국 대사관에서 내쫓은 에콰도르 정부의 공식 입장은 "망명 조건을 어기고 망나니처럼 행동한 어산지 자신이 초래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워싱턴포스트(WP)는 11일(현지 시각) "어산지 추방은 미국과의 교역 증대와 관계 개선을 열망하는 레닌 모레노 에콰도르 대통령의 결단"이라고 보도했다.
전직 대통령의 반미(反美) 노선을 청산하고 친미(親美) 외교를 추진하고 있는 모레노 대통령이 미국과의 관계를 의식해 어산지를 미국에 넘기기로 했다는 것이다. 2012년 어산지의 망명을 허가하고 에콰도르 대사관에 머물게 했던 라파엘 코레아 전 에콰도르 대통령(재임 2007~2017년)은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함께 반미 외교에 적극적이었다. 차베스처럼 석유 수출로 번 돈을 빈민층 무상 지원과 공공 부문 근로자 확대에 쏟아부어 '제2의 차베스'로 불리기도 했다. 어산지의 신병 인도를 강경하게 요구한 영국 정부와 극한 갈등을 벌이면서까지 어산지를 감싼 건 코레아의 반미 노선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2017년 5월 모레노 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코레아 밑에서 부통령까지 지내 그의 정치적 후계자로 알려졌던 모레노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로는 친미·친시장주의자로 전향한 것이다.
모레노는 지난해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을 만나 "무너진 양국 관계를 회복하자"고 선언하고 양국 군대의 합동 훈련을 추진하기로 했다.
에콰도르가 지난 2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42억달러(약 4조8000억원)의 구제금융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모레노의 친미 기조에 미국이 호응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에콰도르는 베네수엘라 독재자 니콜라스 마두로를 축출하려는 미국의 정책에도 적극 호응하고 있다.
코레아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적 동지들은 모레노를 '배신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코레아의 반미 좌파 정책 탓에 침체에 빠진 경제를 살리는 게 시급해 모레노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분석한다. 외신들은 모레노 대통령이 어산지 추방을 계기로 대미 관계를 대폭 개선해 친시장 개혁의 속도를 높이는 동력으로 사용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