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미디어 제국의 '황제' 루퍼트 머독(88) 뉴스코퍼레이션 회장의 각국 정치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 그리고 머독 가문 내 부와 권력을 향한 암투가 공개됐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6개월간 각국에서 머독 주변 인물 150여명을 인터뷰한 장문의 탐사보도 기사를 4일 게재했다.

머독은 미국 폭스뉴스·월스트리트저널과 영국 더선·타임스, 홍콩 스타TV 등 52국에 780여 종의 사업체를 보유한 미디어 재벌이다. '지구촌 정보통신부 장관'이란 찬사부터 '선정적 우파 포퓰리즘을 이끄는 악덕 자본가'란 악평까지 듣는다.

지난 2016년 당시 85세인 루퍼트 머독이 런던에서 열린 자신의 네 번째 결혼식에서 장남 래클런(왼쪽), 차남 제임스(오른쪽)와 웃고 있다.

NYT는 머독 승계권을 두고 벌어진 장남 래클런(47)과 차남 제임스(46)의 '형제의 난'이 각국 언론과 정치 지형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머독은 자녀 6명 중 장녀 엘리자베스(50)와 두 아들에게 적자생존 방식의 경쟁을 시켰다. "모든 자식을 똑같이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 방식은 비정했다.

머독은 처음에 차남 제임스를 후계자로 점찍고 가업 핵심인 영국 시장을 맡겼다. 장남 래클런은 화가 나 수년간 회사에서 손을 뗐다. 그러나 제임스는 2011년 뉴스오브더월드 휴대폰 해킹 스캔들로 스카이뉴스 인수에 실패하면서 후계자 지위에서 밀려나는 분위기다. 머독은 2014년 후계자를 장남으로 교체하기로 했는데, 이 소식을 가족 식사 중 래클런이 누설하자 제임스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머독은 래클런을 뉴스코퍼레이션 공동 회장에 앉혔지만, 여전히 제임스를 각종 대외행사 대표로 내보내는 등 확실하게 승계구도를 정리하지는 않은 상태다.

두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두고 싸웠다. 머독은 LA 베벌리힐스의 집을 제임스가 달라고 조르자 3000만달러에 넘겼는데, 래클런이 뒤늦게 알고 펄펄 뛰자 집안 명품 고가구는 그에게 줬다. 이번엔 제임스가 "집을 사면 그 안의 가구도 다 내 건데"라며 폭발했다.

형제가 유일하게 협력한 건 머독의 세 번째 부인 웬디 덩(50) 문제였다. 머독이 1999년 홍콩 스타TV 앵커 출신인 38세 연하 덩과 결혼하려 하자 두 아들은 아버지를 밤낮으로 찾아 "저 여자는 중국 스파이"라고 말렸다. 덩은 2013년 머독과 이혼했는데, 당시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와 바람을 피우며 늙은 남편을 대놓고 무시했다고 측근들은 전했다. 머독은 2016년 로커 믹 재거의 전처 제리 홀(62)과 재혼했다.

이 형제의 난은 머독 제국이 보수냐 중도·진보로 가느냐를 가르는 분수령이었다. 래클런은 편집권에 실시간 개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호주에선 동성결혼을 옹호한 기자를 당일 해고하고, 폭스뉴스 앵커가 인종 혐오 발언을 할 때마다 "잘한다"는 문자를 보낼 정도로 극우 성향을 보인다. 반면 민주당 지지자인 아내의 영향을 받은 제임스는 폭스 대표로 진보 성향의 CBS 사장 출신을 앉히고 디지털뉴스를 강화하려 했다. 그는 "극우주의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했지만, 결국 그게 돈이 된다는 아버지와 형을 당해내지 못했다.

형제간 경쟁에서 장남 래클런이 승기를 잡으면서 머독 제국 산하의 매체들은 각국에서 극우·보수적 이념 전파에 열을 올리고 있다. NYT는 "머독 제국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토니 애벗 전 호주 총리 당선, 영국 브렉시트 결정, 유럽 극우 포퓰리즘을 기획해 각국 민주주의를 무너뜨렸다"고 했다.

실제로 머독가(家)와 트럼프가(家) 관계는 각별하다. 트럼프의 딸 이방카는 머독 딸들의 3억달러 재산 신탁위원이었고, 사위 제러드 쿠슈너는 머독의 집 인테리어를 바꿔주는 데 나설 정도로 친했다.

트럼프는 2016년 대선 때 보수 여론을 쥔 폭스뉴스가 자신을 "광대 같다"고 비판하자 본인의 이력서 위에 "이래도 내가 광대냐"고 적은 팩스를 방송사에 보냈다. 그 정도로 머독의 인정에 매달렸다. 머독은 트럼프를 "더럽게 멍청하다"며 싫어했는데, 이를 기회로 본 둘째 며느리가 힐러리 클린턴 후보와 회동을 주선했지만 머독이 거부했다. 머독은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로 지명되자 태도를 바꿨고 자주 통화하는 사이로 변했다.

머독은 지난해 1월 카리브해에서 요트를 타다 심장마비가 온 적이 있다. 상태가 심각해 임종을 준비했는데, 승계 문제가 불투명해 가족과 회사 전체가 혼란과 공포에 휩싸였다고 한다. NYT는 "만약 머독이 그대로 사망했으면 (후계 변동으로) 영어권 국가들의 정치 지형이 바뀌었을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