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 키워드로 본 임종헌 재판정 ‘말말말'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재판 과정에서 ‘재판 달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에 걸맞게 임 전 차장은 변호인을 옆에 두고도 2시간 이상 ‘셀프 변론'을 이어간다. 몇 차례 공판에서 그가 쏟아낸 말들은 ‘어록(語錄)’을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임 전 차장의 발언을 호통·비유·예술·강의·한탄 등 5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
①호통: "검사님, 웃지 마세요!"
임 전 차장은 재판에서 자신의 혐의를 조목조목 항변했다. 때로는 검찰의 태도를 지적하며 호통도 쳤다. 그는 지난 19일 공판에 나와 2014년 7월 공보관실 운영비 예산을 불법으로 편성해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에 대해 각 부처 상황에 따른 예산편성 전략이라고 반박했다. 덧붙여 그는 "사회 통념상 허용되는 이른바 '미스라벨링(mislabeling·잘못된 명명)'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이때 피고인이 검사에게 호통을 치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반대 측에 앉아있던 검사 한 명이 잠시 미소를 띄자 임 전 차장은 발언을 멈추고 "검사님, 검사님 웃지 마세요!"라고 언성을 높였다. 당시 검찰은 재판부에 곧바로 "주의를 주셔야 할 것 같다"고 반박했고, 재판부는 "그와 같은 지적은 재판부가 할 일"이라며 "앞으로 그와 같은 발언은 삼가달라"고 말했다. 이에 임 전 차장은 "주의하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②비유: "공소장은 검찰발 미세먼지로 생긴 신기루"
임 전 차장은 피고인석에 앉아서도 거침없는 비유를 쏟아내며 주목을 받았다. 주로 검찰을 비판할 때 비유적 표현을 사용했다. 검찰을 두고 '임종헌 저격수'라는 표현을 하는가 하면, 자신을 '여론의 법정'에 세웠다고 하기도 했다.
그중 가장 화제가 됐던 비유는 검찰의 공소장을 자의적이라고 비판하며 ‘신기루’에 빗댄 표현이었다. 임 전 차장이 처음 출석한 지난 11일 1차 공판에서 "공소장에 켜켜이 쌓인 검찰발 미세먼지로 생긴 신기루가 만든 허상에 매몰되지 말고 피고인 주장과 증인들의 주장을 차분히 듣고 무엇이 진실인지 심리, 판단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이에 검찰은 "신기루인지는 이 사건을 통해 규명돼야 할 것이다. 정치적 프레임을 씌워 왜곡하거나 재판부가 아닌 방청석의 언론을 상대로 변론하려는 듯한 임 전 차장의 시도는 차단돼야 한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③예술: 재판정에 등장한 그림 '시몬과 페로'
"피상적으로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 아니고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틀린 것은 아니다"
이 주장을 위해 임 전 차장은 법정에 명화(名畫)까지 예시로 들었다. ‘신기루’ 발언을 했던 지난 11일 법정에서 임 전 차장은 화가 페테르 루벤스의 그림 ‘시몬과 페로’를 언급했다. ‘시몬과 페로’는 손발이 묶인 늙은 노인이 딸의 젖가슴을 물고 있는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로마 시대 페로라는 여성은 아버지 시몬이 역모죄로 몰려 아사형(餓死刑)을 선고받자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매일 감옥에 찾아가 간수 몰래 아버지에게 자신의 젖을 물렸다. 로마 역사학자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가 쓴 ‘로마의 기념할 만한 업적과 기록들’에 나오는 일화다.
임 전 차장은 이 그림을 통해 검찰의 무리한 기소를 비판했다. 그는 "어떤 사람은 (이 그림을) 포르노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성화라고 한다. 그러나 노인과 여인은 아버지와 딸 사이다. 포르노가 아니라 성화"라고 말했다.
④강의: "검사님, 행정법 교과서를 읽어보시라"
임 전 차장은 사법연수원 16기로, 30년간 법관으로 재직했다. 재판장인 26기 윤종섭(49) 부장판사는 물론이고 검사들도 대부분 후배다. 그래서인지 그는 피고인석에 앉아 '행정법 강의'를 하기도 했다.
2차 공판이 열린 지난 19일 검사는 임 전 차장의 직권남용 혐의와 관련해 "단순 위법한 지시를 한 경우에는 의무 없는 일을 시킨게 아니라는 주장은 처음 봤는데, 지금 피고인이 그런 주장을 하고 있다"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라고 말했다.
그러자 임 전 차장은 검찰을 향해 "제가 독단적인 법리를 창출했다고 하는데 검사님께서 행정법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라고 운을 뗐다. 이어 그는 "공무원은 행정 조직의 일원으로 직무상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있고 직무상 명령이 명백하게 위법한 경우 복종 의무가 없다고 행정법 교과서에 씌어 있으니 자세히 보라"고 지적했다. 당시 법조계에서는 "아직도 자신이 엘리트 판사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는 등 피고인으로서 부적절한 처신이라는 지적도 일었다.
⑤한탄: "오해와 고립무원… 비통한 마음 금할 수 없다"
임 전 차장은 자신이 반평생 몸담은 법원과 사법부가 부패의 온상으로 치부되는 현실에 대한 회한(悔恨)도 감추지 않았다. 지난 11일 재판에서 하늘색 수의를 입고 나온 그는 "법원을 떠난 후 2년간 오해와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해있다가 감옥에 갇히고 법정에 서게 돼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신을 비롯한 사법부 고위 관료들에 대한 이해를 바라는 듯한 발언도 했다. 임 전 차장은 "양승태 사법부가 재판거래와 관여를 일삼는 부패의 온상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되고, 사법행정을 담당했던 모든 법관을 인적 적폐청산의 대상으로 봐서는 안 된다"며 "저들에게도 사법부의 발전을 위해 헌신할 선의가 있었을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