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이 지난 17일 세계서 반(反)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개인을 처벌하는 국제형사재판소(ICC)를 공식 탈퇴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2016년 취임 직후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해 5000여명이 넘는 마약 용의자를 처형했다. 지금까지 처형된 마약 범죄자는 1만2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ICC 탈퇴가 확정되자 필리핀 국내와 국제사회에선 필리핀 국민의 인권 악화를 우려하고 있다.

이날 뉴욕타임스(NYT)와 현지 언론 필리핀스타 등에 따르면 필리핀은 지난해 3월 유엔에 ICC 탈퇴 의사를 통보한 지 1년 만에 ICC 탈퇴를 확정지었다. 법원 규정에 따라 탈퇴 의사를 밝혀도 후 1년간 유예 기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필리핀은 2017년 ICC를 탈퇴한 두번째 국가가 됐다. 첫 국가는 아프리카에 있는 브룬디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2018년 12월 29일 필리핀 민다나오섬 타바토주 키다파완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집단학살 등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개인을 처벌하는 세계 최초의 상설 범죄재판소인 ICC는 두테르테 대통령이 취임 직후 마약과의 전쟁을 벌이며 지금까지 1만2000명 이상을 처형한 것으로 추산되자 지난해 2월 예비조사에 착수했다. 그는 취임 직후 마약 범죄자 5000여명을 처형하기도 했다.

이에 두테르테 대통령은 경찰 등에 조사 거부를 명했고 다음 달인 같은 해 3월 ICC 탈퇴를 선언했다. 필리핀 정부는 사법제도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한 충분한 장치를 마련했다는 이유에서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ICC를 욕하며 ICC 차장검사인 파토우 벤소우다가 필리핀에 입국할 경우 체포하겠다고 으름장까지 놨다.

필리핀의 ICC 탈퇴가 확정되자 필리핀 내부를 비롯해 국제사회에서는 필리핀 인권이 더욱 악화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인권운동가 로멜 바가레스는 필리핀의 ICC 탈퇴를 두고 필리핀 사법 체계의 끔찍한 후퇴라고 말했다고 NYT는 전했다. 바가레스는 필리핀 대법원에 필리핀의 ICC 탈퇴를 금지시켜 달라고 탄원했던 인물이다.

그는 "ICC는 지난 2년 간 마약과의 전쟁 과정에서 일어난 필리핀 사법부의 심각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며 "필리핀 사회는 이것(ICC 탈퇴)으로 인해 큰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했다.

필리핀이 ICC를 탈퇴했지만 ICC 조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리사 혼티베로스 필리핀 상원의원은 성명에서 "필리핀의 ICC 탈퇴는 두테르테 대통령이 처벌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추진한 것"이라면서 "ICC 조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ICC도 "ICC는 필리핀이 회원국으로 있을 때 저지른 범죄에 대한 사법권이 있다. ICC를 탈퇴했다고 해서 조사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이에 살바도르 파넬로 필리핀 대통령 대변인은 지난 14일 기자회견에서 "ICC가 조사를 강행한다 해도 필리핀 정부는 이에 협조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관할권이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