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보다 학교 밖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강인한 인상의 데라오 겐이 말했다. 폭주족 시절에도 책은 끼고 살았던 그다.

피 끓는 시절 엇나가야 멋지다고 생각했다. 중학생 폭주족. 밤마다 불량배와 어울려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어둠 속으로 전력 질주했다. 아들에게 반항기를 물려준 아버지는 부채 의식 갖긴커녕 일탈을 부채질했다. "사내로 태어났으니 나쁜 짓도 해봐야지."

고 2 어느 날, 학교에서 문·이과를 나눌 용도로 장래 희망 설문지를 나눠 줬다. 가진 것이라곤 분출하는 호르몬과 가능성밖에 없는 나이였다. 평생 직업을 써내라는 건 앞으로 펼쳐질 무한한 가능성에 내리는 사형선고 같았다. 이후 학교생활에 회의는 커갔고, 결국 자퇴했다.

교실을 뛰쳐나온 소년은 스페인으로 향했다. 꼬마 때부터 탐닉했던 헤밍웨이의 숨결이 밴 나라였다. 경비는 어머니가 남긴 사망 보험금. 대학등록금으로 쓰려 했던 돈이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등 떠밀었다. "황야로 향하라." 열일곱 살 소년은 '여행'이라는 대학에 진학해 1년간 지중해 일대를 돌았다.

이 폭주족 소년이 훗날 일본 가전회사 '발뮤다'를 창업한 데라오 겐(46)이다. 발뮤다는 '가전계의 애플'로 불리는 브랜드. 국내에선 30만원 넘는 가격에도 '죽은 빵도 살린다'며 주방을 점령한 토스터(누적 판매 10만 대)로 유명해졌다. 공기청정기, 전기 주전자도 디자인 마니아들 위시리스트에 빠지지 않는다.

"실패 경험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많다"는 터프가이. 데라오 겐이 펴낸 자서전 '가자, 어디에도 없었던 방법으로(아르테 刊)'가 최근 번역·출간됐다. 지난주 강연차 한국에 온 그를 만났다. 미세 먼지의 대공습이 있는 날, 남대문 근처 한 호텔이었다. 눈앞의 남산이 사라졌다. 공기청정기 파는 회사엔 호재 아니냐고 물었다. "제 인생에서 재미있고 다이내믹한 일은 건물 밖에서 일어났어요. 그걸 못 누린다면 재앙이지요. 매출이 줄어도 좋습니다. 공기부터 깨끗해져야죠."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그가 입을 뗐다.

인생의 스승, 헤밍웨이와 부모

발뮤다의 트레이드 마크는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디자인이지만 데라오 겐의 삶은 군데군데 움푹 팼다. 대학 동창인 부모는 이바라키현 류가사키에서 서양란 재배업을 했다. 문제는 날씨였다. 태풍과 한파가 덮치면서 사업이 실패했다. 결국 열 살에 부모가 이혼했다. 열네 살 땐 어머니가 하와이에서 스노클링을 하다가 사고로 세상을 떴다.

―순탄치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혼=불행'은 사회적인 통념일 뿐입니다. 두 분은 저와 남동생에게 최선을 다했어요. 방법이 달랐을 뿐. 어머니는 가난해도 어떻게든 삶을 즐기길 바랐고, 아버지는 온 힘을 쏟아 살길 바랐죠.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두 분께 배운 게 훨씬 많습니다."

―특별한 교육법이 있었다면요.

"어머니가 어릴 때 매일 공부를 가르쳤어요. '이건 이런 뜻이다' 설명하지 않고 '이건 무슨 뜻이니?' 물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가르쳐 달라는 거예요. 설명해야 하니 생각할 수밖에요.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사고 훈련을 했어요. 어머니는 '한 번 성공하면 다음에도 성공할 거야'라며 포기하지 않도록 용기 북돋워줬습니다." 아버지는 책상에 메모를 붙였다. '괴로워도 일하라. 안주하지 마라. 이 세상은 순례의 길이다.' 스웨덴 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수필집 속 문장. 부모는 그렇게 달랐다.

단란한 기억도 있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네 가족은 틈나는 대로 노란 중고 승합차를 타고 전국을 누볐다. 밤이면 공영주차장에 주차해 두고 뒷좌석을 젖혀 잤다. 다음날 아침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어머니의 주도로 부모는 헤밍웨이 원서를 읽었다. 집에도 선반 가득 책이 있었다.

발뮤다 대표 제품. 물을 붓는 토스터 ‘더 토스터(왼쪽)’와 전기주전자 ‘더 팟’.

―책에 둘러싸여 자랐군요.

"보통 사람 10배는 읽은 것 같습니다. 아홉 살 때쯤 아버지가 헤밍웨이 단편집을 던져 주셨어요. 사랑, 전쟁 등 온갖 주제가 있었어요. 희극보다는 비극이 많았고요. 꼬마였지만 책을 읽으면서 언제든 불행이 닥쳐올 수 있으니 어떤 시련이 와도 헤쳐나갈 힘을 길러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부모의 삶이 준 교훈이 있다면.

"어머니의 죽음을 보면서 '누구나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오늘 당장 시작하자 다짐했습니다. 부모님의 이혼은 안전하다고 믿었던 울타리도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내가 알아서 나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범한 부모가 비범한 자식을 키운 듯합니다. 당신도 그런 부모인가요.

"저희 형제처럼 10세, 14세 아들 둘이 있습니다. 5세까지 아이에게 최대한 사랑을 줬고 그다음부터는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말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느끼게 하는 편이 빠르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중심, 텍스트

―왜 책을 냈습니까.

"처음 회사를 세웠을 땐 혼자 일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는데 지금은 직원이 100명이 넘습니다. 자잘한 일은 직원들이 하지요. 제가 할 일이 적어지니 예술적인 일을 할 기회도 덩달아 줄었어요. 크리에이티브하면서도 내게 중요한 게 뭘까 생각했어요. 답은 글이었습니다."

―가전회사 대표가 '글이 중요하다' 하니 뜻밖입니다.

"텍스트에 예민한 편입니다. 시인을 꿈꿔 시를 많이 썼어요. 음악 활동하면서 작사도 많이 했고요."

한때 록 가수였다. 여행하면서 얻은 자신감이 무기력한 인생과 결별하고 새로운 길로 뻗어나가는 추진체가 됐다. 귀국해 록스타 브루스 스프링스틴에 빠져 록 음악으로 시(詩)를 표현하겠다고 마음먹었다. 10년 가까이 록 뮤지션으로 활동했다.

―말과 글이 왜 중요하다고 봅니까.

"언어는 이 세상 모든 인공물의 원천입니다. 언어가 없으면 생각할 수 없으니 모든 발명품은 언어에서 비롯됐다고 봅니다. 가전회사인데 직원들에게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우리 일의 핵심은 언어다'입니다."

―그런 철학이 제품엔 어떻게 반영되는지요.

"광고 카피와 설명문은 제가 다 씁니다. 새로 나온 공기청정기 카피는 '기분 좋은 방'입니다. 일반적으로 '심플한 디자인의 공기청정기' 식으로 달 거예요. 소비자가 원하는 건 기계 자체가 아니에요. 공기청정기를 통해 깨끗해진 공기, 그로 인해 기분 좋은 공간입니다. 결국 '멋진 인생' 아닐까요. 그런데 예술가도, 음악가도 타인에게 멋진 인생을 줄 수는 없습니다. 멋진 인생을 꾸리는 데 영향을 미치는 작은 경험을 줄 뿐이죠. 발뮤다도 그런 역할을 하려 합니다."

―가족 얘기가 책 대부분을 차지하던데 아버지 반응이 궁금합니다.

"일본에서 책이 나온 게 2017년 봄이었는데 그해 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책을 보시더니 '너 되게 멋지다' 하시더군요. 치매를 앓고 계셨는데." 아버지는 서양란 사업이 망한 뒤 신문 배달 등 갖은 일을 하다가 도예가가 됐다.

데라오 겐에겐 쓰고 읽는 행위가 몸에 뱄다. 발뮤다 직원들에게도 “가전 회사이지만 우리 일의 중심은 언어”라고 늘 강조한다고 했다.

―치매였다고요?

"돌아가시기 전 암, 허리 디스크에 치매까지 겹쳐 급격히 쇠약해지셨어요. 남은 힘 한 방울까지 다 쓰고 가시는 듯했습니다. 죽음마저도 전력투구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 마지막이 참 멋있었습니다."

―죽음이 멋있었다니요.

"마지막으로 뵈러 갔을 때 제 이름도 깜빡할 정도였는데 '내 인생은 나 스스로 끊겠다'고 하셨습니다. '자살(自殺)'이 아니라 '자결(自決)'이란 단어를 쓰시더군요. 스스로 당신의 삶을 마무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자결' 계획을 말했다. "도자기 굽는 가마 위에 올라가 떨어져 죽을 거야. 사다리도 구해 놨어." 아들은 농담 섞어 말렸다. "거기서 뛰어내려도 안 돌아가시니 절대 하지 마세요!" 일주일 후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가마 지붕 밑에서 돌아가신 채 발견됐다고 했다. "희미해지는 기억력을 붙잡고 계획을 감행한 겁니다. 아버지의 마지막은 이성의 승리였습니다. 나만의 영웅이 영웅다운 방법으로 최후를 맞았구나 싶었습니다."

내 삶의 원동력, '하기 싫다'

록 밴드 해체 무렵 아내를 만났다. 공연에 자주 오던 동갑내기 여인이었다. 인테리어 디자인을 배우던 아내의 집에 놀러 갔다가 네덜란드 디자인 잡지 '프레임'을 보고는 디자인의 세계에 빨려 들어갔다. 파칭코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독학으로 디자인을 공부했다. 제도용 소프트웨어를 배워 도면을 그리고, 전화번호부를 펼쳐 공장에 연락해 절삭 가공을 배웠다. 워밍업을 끝내고 2003년 발뮤다를 창업했다. 직원 하나 없는 1인 기업, 사옥은 아내와 사는 도쿄 근교 무사시노의 월셋집. 그야말로 가내수공업이었다.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아 힘들지 않았습니까.

"결론적으로 제 삶이 학교에 다녔는지 안 다녔는지, 디자인을 전공했는지 안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증명해주지 않습니까. 디자인으로는 일본 가전회사 중 1등이라고 자부합니다."

―공부 말고 그럼 뭐가 중요하나요.

"사랑!"

―디자인 사랑?

"아뇨. 사람에 대한 사랑. 디자인을 하든 음악을 하든 모든 일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니까요. 어쩌면 '연애'야말로 '브랜딩'의 교본이라고 생각해요. 상대가 뭘 좋아할지, 그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 끊임없이 연구하고 행동하잖아요. 제품도 그렇게 만들면 성공하죠."

―폭주족에서 록 가수로, 다시 가전회사 경영자로.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입니다. 좌절도 많았을 텐데요.

"나를 움직이는 힘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 '이걸 하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라 '이건 하기 싫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제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유인데 그걸 가로막는 게 나타나면 '거절'했습니다. 어린애가 떼쓰듯 '거부'하는 게 아니라 운명에 맞서 어른답게 능동적으로 '거절'하는 겁니다."

70만원 대 신형 공기청정기 ‘더 퓨어’(왼쪽)와 파산 직전 개발해 대박을 터뜨린 선풍기 ‘그린팬’.

―어른다운 거절이라 함은 뭘 말하는 건가요.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까지 기쁘게 하는 결과를 낳는 거절을 말합니다."

―그런 거절의 순간이 있었습니까.

"가장 큰 거절은 자퇴였습니다. 장래 희망을 적어내라는 걸 거절하고 새 인생을 개척했습니다. 그다음은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2009년 파산 위기까지 갔을 때 회사가 쫄딱 망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망하는 걸 거절했다니요.

"가만히 있어도 파산할 거라면 그사이 시도 못 했던 아이디어를 제대로 구현해보고 쓰러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불황에도 사람들의 마음을 산다면 파산을 '거절'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작은 배에 구멍이 뚫려 물이 차오르는 상황이었죠. 그냥 물 밑으로 가라앉기보다 그사이 새 엔진이라도 개발해 모터보트로 바꿔보자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때 나온 제품이 자연 바람처럼 보드라운 바람을 내는 선풍기 '그린팬'. 남은 자금을 탈탈 털어내 기술부터 개발하고 샘플 딱 한 대를 만들었다. 여행 가방에 선풍기 샘플을 넣고 전국을 돌며 투자자를 구해 다녔다. 그의 기술을 믿은 한 모터 회사로부터 극적으로 투자를 받아냈다. 결과는 대성공. 출시한 해 1만2000대가 팔렸다. 연 매출은 2009년 4500만엔에서 2017년 89억엔까지 치솟았다. 8년 만에 200배나 커졌다. 이 중 한국 매출 비중이 전체의 30%다.

―한국이 발뮤다를 먹여 살리는 것 아닌가요(웃음).

"2011년 한국 회사(리모텍)에서 우리 제품을 팔고 싶다고 찾아왔습니다. 첫 해외 진출이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잘될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한국과 발뮤다의 궁합이 좋은가 봅니다."

―한국 소비자 특유의 쏠림 현상 덕을 본 듯도 합니다.

"치우침이 있고 유행이 빠른 건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 소비자의 성향입니다. 달리 생각하면 아름다움의 기준이 명확하고 자기 의견을 뚜렷이 밝힌다는 얘기지요."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제품을 만들고 싶다고 했는데 가격은 결코 기쁨을 주는 가격이 아닙니다(신형 공기청정기는 70만원대).

"제작 단가가 높다 보니…."

―신입 사원 제1 요건이 '목소리 큰 사람'이라고요?

"면접 볼 때 목소리가 작으면 바로 탈락시킵니다. 목소리가 작으면 듣는 사람이 귀 근육을 많이 쓰게 합니다. 어떤 일을 하든 궁극적인 목표는 상대를 편안하고 기분 좋게 하는 건데 상대에 대한 배려가 적은 것이니까요."

―책에서 "꿈이 끝났다는 건 가능성을 잃었을 때가 아니다. 꿈은 주인이 열정을 잃었을 때 비로소 끝을 맞이한다"고 했습니다. 당신 꿈은 아직 건재한가요.

"늘 열정에 휘둘리는 인생을 살아 문제입니다(웃음). 주인의 열정이 넘치니 꿈도 건재할 거고요."

지난해 다시 밴드를 결성해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자 넘치는 열정을 쏟아낼 분출구가 필요해서"라고 했다. 그의 꿈은 노화를 모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