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국내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다. 북간도 용정과 연해주, 하와이와 필라델피아 등 한민족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지 만세 시위가 열렸다. 1919년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내내 3월 1일이 돌아오면 기념식을 갖고 태극기를 게양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민단이 1920년 3월 1일 상하이 올림픽극장에서 거행한 제1회 독립선언기념식이 대표적이다.
북간도 용정(龍井)은 국외에서 펼친 3·1운동 가운데 유일하게 사상자가 발생한 곳이다. 1919년 3월 13일 용정 북쪽 서전들에 한인 1만 명이 모여 독립선언과 만세 시위를 벌였다. 종교·교육계가 중심이 된 이날 시위는 연길·화룡·왕청·훈춘으로 확대됐다. 학생이 대부분이었고 교사도 상당수 참여했다. 민족학교 교사들은 항일 민족정신과 민족의식이 투철했다. 명동학교를 비롯해 대부분의 민족학교 구성원들이 3·13 시위를 계기로 3·1운동 전면에 등장했다.
연해주 한인 이주의 역사는 1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64년 처음 한인이 정착하면서 연해주는 독립운동 전초기지로 떠올랐다. 1910년대 1차 대전과 러시아 10월혁명을 겪으면서 연해주 한인들은 조직적으로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한인 지도자들은 3월 8일 포시에트항으로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한 러시아 기선을 타고 국내로부터 들어온 1000여 명의 동포를 통해 독립선언서가 발표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한국민의회는 러시아 당국의 공식 허가를 받아 3월 15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가두시위를 계획했다. 하지만 당국은 블라디보스토크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대한국민의회와 블라디보스토크 한민회에 대해 폐쇄령을 내렸다. 하지만 대한국민의회는 3월 17일 오전 우수리스크에서 독립선언서 발표식을 열고 오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선언과 가두시위를 벌였다. 한인 상점은 모두 철시했고 11국 영사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다음날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은 한인 노동자 총파업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연해주의 3·1운동 열기는 4월까지 이어졌다.
미주 한인 사회도 움직였다. 대한인국민회는 세계에 3·1운동 소식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 시내 리틀극장에서 제1회 한인회를 개최했다. 일제의 불법적인 식민 통치와 노예적 삶을 영위하고 있는 한국의 실상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과 새로운 국가 건설의 열망을 미국 사회에 알렸다. 150여 명이 참석했다. 당시 북미 거주 한인이 1500여 명에 불과했는데 상당수 한인이 독립만세 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참가자들은 필라델피아 시내를 행진하면서 독립선언 소식을 널리 알렸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20년 첫 3·1절을 성대하게 기념한 이래 해마다 3월 1일을 기렸다. 1940년대 중국 전시 수도였던 충칭에서도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기념했다. 하와이와 미주, 연해주 등 세계 곳곳에서 한인들은 3·1절을 맞을 때마다 조국 독립의 각오를 다졌다. 도산 안창호의 말처럼 "우리 민족이 영원히 기억해야 할 기념일"이기 때문이었다.
공동기획: 한국민족운동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