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문희상 국회의장이 ‘칼 찬 순사’니 ‘도둑이 제 발 저린 소리’ 같은 자극적 발언을 대놓고 한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인사들도 ‘입이 있는데 말도 못하냐’는 식으로 반일(反日) 감정을 부추긴다. 결국 돌아오는 피해는 국가와 국민의 몫이 되는 것이다. 부부간 싸울 때도 문 하나 열어놓고 싸우라고 했는데….”

권철현(72) 전 주일대사는 말문을 열었지만, 이내 "현 정권은 어떤 의도를 갖고 저러는데 내가 말해봐야 무슨 소용 있을까" 울적한 기분을 드러냈다. 하지만 지금 최악(最惡)의 한·일 관계에 대해 그보다 더 말할 자격이 주어진 인물은 없을 것이다.

올해는 '3·1절 100년'이지만, 3선(選) 의원 출신의 그가 주일대사로 재직하던 기간(2008년 4월~2011년 11월)에는 훨씬 더 예민한 '한·일 강제병합 100년'이 있었다.

권철현 전 주일대사는 "이제 우리도 국가 위상에 맞게 일본에 관용을 보여줄 때"라고 말했다.

"그때도 반일감정을 부추기는 발언이 있었으나 '지나간 100년을 잘 극복하고 새로운 100년을 향해 나가자'는 논리가 더 큰 지지를 받았다. 당시 나는 일본 정계·재계·학계·언론계 인사와 접촉해 한·일 관계의 미래에 대해 얘기했다. 그렇게 해서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의 사죄 담화를 받아냈다. 아시아인 전체에 대한 일본의 사과는 있었지만, 한국인만을 위한 사과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일제 총독부가 강제 반출한 조선왕실의궤 등 도서 1205점도 반환받았다."

그의 대사 재임 시절 도쿄에서 일본 왕실의 귀빈 등 14만명이 참석한 한·일 축제한마당이 열렸고, 총리의 부인이 한국말로 축사했다. 글로벌 외환 위기가 닥쳐 일본과 300억달러의 통화 스와프 협정도 체결됐다. 임기를 마치고 귀국할 때 그는 한·일 관계 개선의 공(功)으로 역대 주일대사로는 처음 일왕 부부의 오찬에 초대받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3·1절 100주년 기념사에서 "빨갱이 낙인은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대표적 친일 잔재"라고 말했다. 느닷없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빨갱이'라는 말을 다섯 번이나 썼다.

"100년이나 지난 3·1절에 반일 감정을 불러내 국민을 분열시키려는 의도 같았다. 대통령이 해서는 안 되는 발언이었다. 빨갱이 용어는 해방 공간(1945~1948)에서 나온 걸로 안다. 사실관계에도 맞지 않는다."

―지금 정권에서 '빨갱이'는 당당한 훈장처럼 됐고, '친일' 낙인은 보수 세력을 공격하는 무기처럼 됐다.

"웃기는 것은 현 정권 실세나 여당 의원 중에도 친일파 자손이 많다는 점이다. 한·일 고대사에서는 문명(文明)을 전래받은 일본이 한국에 대해 콤플렉스가 있다. 반면 근대사에서는 식민지 지배를 받은 한국이 일본에 대해 콤플렉스가 있다. 그런 반감과 콤플렉스로 일본을 대하면 끝이 없다. 지도자라면 이제는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 올바른 얘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하노이 미·북 회담이 결렬되자 좌파 진영에서는 '일본 때리기'에 나섰다.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는 "하노이 담판 결렬 뒷전에 일본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회담 결렬에 대해 전 세계에서 제일 좋아한 사람이 일본 아베 신조 총리였다"라고 했다.

"일본이 트럼프에게 회담을 파투 내도록 할 만한 영향력이 없다는 걸 알지 않나. 일본을 때려서 회담 결렬에 따른 책임이나 좌절감을 돌리려는 것이다. 소위 외곽을 때려 국면을 바꾸려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아베 신조 총리가 회담 결렬과 관련해 "트럼프의 결단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발언은 했지 않나?

"하노이 회담에서 북한 비핵화 문제가 이상하게 타협되는 것보다는 현 상황이 낫다고 봤을 수는 있다. 자기가 원하는 정상 궤도로 가자는 것이다. 이게 일본 국익에 맞는 것이다. 회담 결렬 후 아베 총리는 '일·미·한의 긴밀한 연대는 극히 중요하다'고 했다."

―남북 관계 개선이나 우리 민족끼리 해보려는 것에 대해 일본이 훼방 놓는다는 시각도 있는데.

"전후(戰後) 한국의 발전 과정에서 일본이 훼방 놓은 적이 있었나. 일본과는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대사 재직 시절 도쿄를 방문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머리에 쓰는 갓의 두 개 끈 중에서 하나만 잘라도 바람에 날아가듯이 한국은 미국이라는 끈과 일본이라는 끈 중에서 어느 하나만 잘라버리면 무너진다'며 일본의 중요성을 말한 적이 있다. 한국 안보와 경제 발전을 위해 일본은 꼭 필요한 파트너다."

―작년에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나오면서 일본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1965년 한일협정을 깼다고 본 것이다. 대통령이나 정부가 타국(他國)과 협정을 맺었는데 대법원이 이를 최종 판단하는 게 옳은가?

"대법원 판결은 한일협정이 무효라는 것은 아니었다. 인도적 차원에서 개인 배상 청구가 가능하다는 취지였다. 피해 당사자들의 고통에 대한 배상이 충분히 안 된 협정이었다는 것이다."

―한일협정의 미흡한 배상 부분에 대해 일본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일본은 "한국 측이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한일협정에는 그런 개인적 배상이 포함돼 있었고 일단 협정을 맺었으면 뒷말이 없어야 한다는 게 일본의 입장이다. 우리 대법원이 그렇지 않다고 판결했지만 실효성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일본은 이 사안에 대해 '국제사법재판소의 최종 판단을 받자'고 하지만 우리는 실익이 없어 안 가려고 한다. 결국 판결은 집행되지 않고 그냥 넘어갈 것이다."

조선왕실의궤 등이 인천공항으로 들어오는 장면.

―신일본제철이나 미쓰비시 등의 서울사무소에 대한 자산 압류를 강제 집행할 수 있지 않나?

"가령 신일본제철에 대한 지분을 미국도 갖고 있다. 미국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겠나."

―징용 배상 판결 직후 공해상에서 일본 초계기 위협 비행과 우리 군함의 레이더 조사(照射)를 둘러싼 군사적 갈등이 터져나왔다.

"처음 일본 초계기의 근접 저공비행이 의도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뒤 네 차례 더 있었던 근접 비행은 의도적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아베 총리가 평화헌법을 보통헌법으로, 자위대를 군대로, 해상보안청을 해군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하고 싶은데 충돌 상황이 도움 된다고 판단한 것 같다."

―문 대통령은 신년 연설에서 한·일 관계 개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일본 기자가 징용 배상 판결로 인한 한·일 갈등에 대해 묻자 "그 문제는 한국 대법원이 판단한 결과다. 삼권분립 원칙에 따라 한국 정부는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해야 한다. 이는 과거의 불행했던 역사 때문에 만들어지고 있는 문제다. 일본 정부가 거기에 대해 조금 더 겸허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본을 가르치는 듯한 발언이 우리 국민에게는 기분 좋게 들렸을지 모르나 양국 관계를 더 악화시켰다.

"누가 삼권분립의 나라인지를 모르나. 그런 형식논리적인 답변을 들으려고 했겠나. 대통령은 국익을 추구하는 최고 높은 외교관이기도 한데, 일본과의 관계를 온통 국내 정치용으로 쓰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문희상 의장도 '일왕이 한국에 와서 위안부 할머니 손을 잡고 진심으로 사과하면 풀린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발끈하자, 문 의장은 '도둑이 제 발 저려''적반하장'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너무 심하지 않나.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선(線)을 지켜야 할 게 있다. 이게 무시되고 있다."

―그 지켜야 할 선이란, 상대국에 대한 배려나 존중을 말하는가?

"한·일 의원연맹 회장을 지낸 국회의장이라면 그런 말 한마디로 그동안 쌓아온 관계가 쉽게 허물어질 수 있고 일본 측의 책임 있는 사과를 받아내는 데도 전혀 도움 되지 않는다는 걸 알지 않나."

―우리 사회에서는 반일 발언을 하면 애국자처럼 봐주는 분위기가 있다.

"일본 정치인들의 반한(反韓) 발언에 기분 좋게 느끼는 일본인들은 상대적으로 적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반일(反日)은 아무리 도를 넘어도 죄가 아니라는 '반일 무죄'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무슨 말이든 무슨 행위든 반일이면 괜찮다는 것이다. 가령 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이나 징용근로자상을 세우는 것은 빈국제협약에 위반되는데도 다들 장하다고 여긴다. 이를 아는 정부도 방관한다."

―우리는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충분히 사과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일본의 친한파 정치인과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한국에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과를 요구한다. 도대체 언제까지 사과해야 하느냐'라는 불만이 있는 것 같다.

"일본이 몇 번 사과를 하기는 했지만, 그러한 사과를 무색하게 하는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계속됐다. 이 때문에 더 진정성 있는 일본의 사과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본 정부에 '상대방이 그만하면 됐다고 할 때까지 해주라'고 하긴 했다. 하지만 우리도 지금 국가적 위상에 맞게 관용을 보이고 매듭지어도 될 만한 단계가 되지 않았을까."

―설령 그렇게 한다 해도 여전히 '독도'라는 영토 문제에서 막힌다.

"대사 시절 독도 문제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서 '독도는 내 호주머니에 든 보석이다. 상대방이 시비 걸 때마다 이를 꺼내서 내 것임을 확인시켜 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독도는 우리의 주권이 행사되고 있는 우리 영토이다. 우리가 먼저 나서서 일본을 자극할 필요가 전혀 없다. 독도를 분쟁 도서로 몰아 국제사법재판소로 가겠다는 일본의 꾀에 말리면 안 된다."

작년에만 한국인 750만명이 일본을 여행했다. 요즘 취업난에 몰린 한국 청년들도 일본으로 건너가고 있다. 한류(韓流)가 일본 사람들을 매료시켰듯이, 일본풍이 우리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다. 집권 세력은 과거를 들춰내 반일 감정을 부추기지만 국민 상당수는 일본과 불편하게 지낼 수 없다는 걸 몸으로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