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취임 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올해 말 총선을 의식해 지역구 대표 기업의 비리를 수사하던 검찰에 압력을 넣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다.

압력을 받은 당사자로 지목된 조디 윌슨-레이볼드 보훈장관(전 법무장관)은 지난달 전격 사임하며 폭로를 이어가고 있다. 집권 자유당의 목소리 역할을 해온 제인 필포트 재무장관도 4일(현지 시각) "더 이상 트뤼도 내각의 편을 들어줄 수 없다"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보수당 등 야당은 트뤼도 총리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총리실 수석보좌관이었던 제럴드 버츠가 오는 6일 하원 법사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트뤼도 총리를 변호할 예정이지만, 논란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으로 보인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사법당국의 수사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정치적 위기에 놓였다. 사진은 트뤼도 총리가 2018년 12월 19일 오타와에서 중국의 3번째 캐나다인 억류와 관련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트뤼도 총리의 검찰 수사 개입 논란은 캐나다 유력 일간지 글로브앤메일의 지난달 7일 보도로부터 시작됐다. 트뤼도 총리와 총리실 관계자들이 지난해 가을 윌슨-레이볼드 당시 법무장관에게 SNC-라발린을 기소하지 말라고 압력을 가했다는 것이다.

SNC-라발린은 캐나다의 최대 종합건설회사로, 트뤼도 총리의 정치적 고향인 퀘벡주 몬트리올에 본사를 두고 있다. 2001~2011년 리비아에서 공사를 수주하기 위해 무아마르 카다피 당시 대통령 일가에 4800만캐나다달러(약 400억원)의 뇌물을 준 혐의로 2015년부터 검찰의 수사를 받아왔다.

트뤼도 총리는 글로브앤메일의 보도를 "가짜 뉴스"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윌슨-레이볼드 전 장관이 지난달 12일 돌연 사임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자유당 소속인 윌슨-레이볼드 전 장관은 이후 하원에서 "캐나다 국민들은 내가 진실을 말하기를 원한다"고 밝혀 의문을 증폭시켰다.

트뤼도 총리의 최측근이었던 버츠 수석보좌관은 윌슨-레이볼드 전 장관이 사임한지 엿새만인 지난달 18일 사직서를 제출했다. 버츠 보좌관은 사임 성명에서 "나를 포함해 총리실의 그 누구도 압력을 행사한 적이 없다"고 의혹을 부인했다.

캐나다 하원 법사위원회는 결국 진위 파악을 위한 청문회를 열고 윌슨-레이볼드 전 장관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자유당은 윌슨-레이볼드가 법무장관으로 근무하며 정부를 대변하는 변호인의 지위를 가졌던 만큼 고객, 즉 내각의 비밀을 준수해야 하는 변호사 의무 규정이 적용된다며 이를 반대했지만 트뤼도 총리는 내각 명령을 통해 그에게 발언권을 줬다.

조디 윌슨-레이볼드 전 캐나다 보훈장관.

윌슨-레이볼드 전 장관은 청문회에서 "법무장관으로 재임 중이던 지난해 9월부터 12월까지 열 차례의 전화와 열 번의 면담, 그리고 문자 메시지 등으로 압박을 받았다"며 이 과정에서 총리실과 재무부, 추밀원 등 내각의 총리 측근 11명이 자신과 접촉했다고 밝혔다.

트뤼도 총리가 직접 SNC-라발린의 기소유예 처리를 압박한 것은 지난해 9월 17일 추밀원 간부와 함께 만난 자리에서였다고 증언했다. 윌슨-레이볼드 전 장관은 트뤼도 총리가 사건 처리에 따른 지역 일자리 손실과 회사 이전 등을 우려했다며, 총리가 퀘백주 출신 하원의원이라는 사실과 연말로 예정된 퀘벡주 선거를 언급했다고 말했다.

윌슨-레이볼드 전 장관은 자신이 지난 1월 개각에서 보훈부 장관직으로 밀려난 것도 트뤼도 내각의 사건 처리 압력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트뤼도 총리는 2015년 11월 취임 이후 윌슨-레이볼드 전 장관을 직접 법무장관에 임명했다.
야권은 윌슨-레이볼드 전 장관의 증언 직후 트뤼도 총리의 사퇴를 촉구했다. 제1야당인 보수당의 앤드루 시어 대표는 "총리가 통치를 지속할 수 있는 도덕성을 상실했다"며 사법당국에 트뤼도 총리에 대한 수사를 압박하고 나섰다. 트뤼도 총리는 "윌슨-레이볼드 전 장관과 이 문제를 논의한 적은 있지만 그가 외압이라고 느꼈다면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했어야 했다"고 반박했다.

윌슨-레이볼드 장관과 함께 트뤼도 내각의 굵직한 업적을 이끌어온 필포트 재무장관은 4일 트뤼도 총리에게 서한을 보내 사임의 뜻을 밝혔다. 필포트 장관은 서한에서 "법무장관에게 사건과 관련해 정치적 압력이나 기소권 행사를 방해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기본적인 원칙"이라며 "안타깝게도 나는 내각이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대응할지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고 썼다.

파문이 확산되면서 유권자들의 마음도 돌아서고 있다. 캐나다 여론조사기관 나노스가 지난 3일 공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26%가 올해 총선 투표 때 이번 스캔들을 참고하겠다고 답했다. 이는 윌슨-레이볼드 전 장관이 청문회에서 증언을 하기 전 17%에서 약 10%포인트 가량 늘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