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高宗) 서거는 의료 사고?"

1919년 1월 21일 세상을 떠난 고종의 사인(死因)을 놓고 학계에선 일제에 의한 '독살설(說)'과 이를 부정하는 '뇌출혈설'이 대립해왔다. 그런데 의료 사고설을 주장하는 새 학설이 나왔다. 윤소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술연구부장이 28일 '3·1운동 100년,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한국역사연구회·한국학중앙연구원 공동 주최)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고종 독살설 재검토'라는 논문이다.

1919년 3월 3일 고종 장례 행렬이 덕수궁으로 들어가는 광경.

고종 독살설은 3·1운동 당시 거리에 나붙은 격문과 지하신문은 물론,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도 서술될 만큼 널리 유포됐다. 을사늑약에 반대했고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강제 퇴위당한 고종이 1919년 1월 25일 예정된 영친왕과 일본 왕족 이방자 여사와의 결혼에 반대했다는 얘기까지 나돌았기 때문이다.

윤 부장은 고종 임종을 지킨 일본인 여의사 도가와 기누코(戶川錦子)의 당시 증언을 주목했다. '4~5일 전부터 고종은 식욕이 다소 떨어지고 불면증과 구갈증(口渴症)을 느꼈다고 호소했지만 (담당 의료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며칠 전부터 뇌출혈 전조를 보였지만 의료진이 놓쳤다는 것이다. 독살설 근거로 거론되는 목 부위와 복부의 검은 줄이나 시신 팽창 등에 대해서는 "시신이 부패하고 있는 모습을 설명할 뿐 독살을 입증하는 근거는 될 수 없다"면서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논문은 일제가 고종 사망 발표를 늦추고자 했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같은 해 1월 25일로 예정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혼례식을 앞두고 당시 조선 총독과 고위 관료들은 대부분 일본으로 떠났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이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이왕직(李王職) 사무관 곤도 시로스케(權藤四郞介) 등이 혼례를 강행하기 위해 고종 서거를 비밀에 부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일제의 발표 연기는 고종 독살설의 확산을 오히려 부채질했고 민족적 분노를 자극해 3·1운동 도화선이 됐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