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관련 판결문은 유네스코 등재를 통해 인류가 공유해야 할 세계문화유산입니다."

지난 22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둘러보던 사사카와 노리카쓰(笹川紀勝·79) 일본 국제기독교대학 명예교수는 "판결문 기록들은 한국인의 저항을 보여주는 1급 역사 자료라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사사카와 교수는 일제강점기 형사 판결문 6608건을 정리하는 작업을 4년째 하고 있다. 이 가운데 3282건이 3·1운동 관련이다. 그는 "3·1운동이 전(全) 민족적·민중적 저항이었다는 사실이 판결문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며 "특히 참가자들이 분노보다는 환희와 감격에 차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사사카와 교수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일(韓日) 학자들이 공동 집필한 '3·1독립만세운동과 식민지배체제'(지식산업사) 출간을 맞아 최근 방한했다. 그는 논문 3편을 게재하고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와 공동 편집자를 맡았다.

22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둘러본 사사카와 노리카쓰 일본 국제기독교대학 명예교수가 독립 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른 이인술·임우철 선생의 이름이 적힌 수용실 문을 붙잡고 있다.

일본어 판결문은 초서체로 적혀 있거나 인쇄된 글자가 지워지고 뭉개져서 알아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는 재판 대상자와 죄목은 물론, 판결문을 읽고 일일이 주석까지 달았다. 사사카와 교수는 "판결을 받고 투옥됐던 100년 전 사람들의 목소리를 후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들의 명예를 회복할 길도 없다"고 말했다.

헌법학자인 그는 3·1운동이 한·일 양국의 헌법 정신에도 큰 차이를 가져왔다고 했다. "3·1운동으로 수립된 임시정부의 헌법을 잇는 한국의 헌법은 압제에 항거해 쟁취한 것인 반면, 일본은 2차 대전 패전 후 맥아더 최고사령부(GHQ) 시기에 만들어진 헌법"이라고 했다. 저항적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야말로 양국 현대사의 차이를 설명하는 핵심어라는 설명이다.

사사카와 교수는 2010년 일본의 한국 병합이 불법이라고 선언한 한·일 지식인 1000여 명 공동 성명에도 참여했다. 이번 논문에서 그는 3·1운동 당시 일제의 잔혹한 탄압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했다고 하지만 자유민권운동은 철저히 억누르고 공화제는 입에 담지도 못하게 했다"면서 "그 영향으로 비폭력적인 3·1운동마저 소요와 내란으로 간주하고 탄압한 것"이라고 했다.

최악으로 치닫는 현재 한·일 관계에 대해 사사카와 교수는 "양국 관계의 정상화를 위해서라도 일본인들이 3·1운동의 비폭력 저항 정신을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에서는 불편하고 민감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주장이지만 그는 "일본이 더 좋은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이야기"라고 했다. '더 좋은 나라'의 의미를 묻자 그는 "국가가 저지른 일을 스스로 책임지고 바로잡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과거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됐던 2.3㎡(0.7평) 남짓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독방에서 그의 발길이 오랫동안 멈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