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 규모가 일제가 밝힌 공식 통계보다 두 배 넘게 크다는 사실이 처음 밝혀졌다. 일제는 3·1운동 시위 848회, 참여 인원 50만여 명으로 공식 집계했었다. 하지만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조광)가 지난 2016년부터 3년간 '3·1운동 100주년 기념 DB(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을 진행한 결과, 전국과 해외를 합산한 총 시위 횟수는 1716회나 됐다. 시위 참석자도 100만명이 넘는 대규모 민족운동이었다. 일제 당국이 은폐하거나 누락한 시위가 공식 기록보다 많은 868건이나 됐다. 지금까지 3·1운동은 시위 횟수와 참여 인원 등 기초적 숫자조차 믿을 만한 통계가 없었다. 교과서는 일제 공식 자료에 의거해 시위 횟수를 848회로 기술해 왔다.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는 일본 육군성 자료인 '소요사건관계서류철(騷擾事件關係書類綴)', 조선총독부 자료 '소요사건에 관한 도장관(道長官) 보고철', 외무성 기록 '불령단관계잡건(不逞團關係雜件)', 경성지법 검사국 문서 자료와 판결문 자료, 재한 선교사 자료 등 모두 2만여 건의 3·1운동 관련 1차 사료를 모두 데이터베이스화해 시위 정보를 뽑아내고 지리정보 시스템과 연계했다.

국편 측은 "방대한 자료를 일일이 조사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국가 기관이 아닌 일반 연구자가 할 수 없었던 작업이었다"며 "일제 측 보고서와 판결문, 선교사들의 자료를 종합적으로 살펴본 뒤에야 시위의 모습이 전체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고 밝혔다.

1919년 3~5월에 집중된 3·1운동 관련 사건은 ▲시위 1716건 ▲계획 335건 ▲철시(撤市) 25건 ▲파업 3건 ▲동맹휴학·휴교 60건 ▲기타(독립선언서 배부, 방화·투석 등) 326건 등 모두 2466건이라는 통계가 처음으로 나왔다.

시위는 지역별로 경기도(서울 포함)가 410건으로 가장 많았으며, 황해도(181건), 평북(149건), 경남(143건), 경북(119건), 충남(115건), 평남(110건), 함남(86건), 충북(81건) 등의 순이었다. 해외에서 일어난 시위도 99건에 달했다. 서울의 시위 횟수는 31건이었다. 3·1운동 시위와 관련해 검찰에 송치된 인원은 모두 1만9054명이었다. 수도권 다음으로 시위 건수가 많았던 곳은 황해도였다. 학계에서는 '천도교·기독교가 조직적으로 시위를 주도한 황해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공세적이고 저항성이 강했다'(박찬승 '한국독립운동사')고 보고 있다.

지금까지 3·1운동의 시위 횟수는 ▲1919년 조선헌병대사령부가 작성한 '조선소요사건일람표'에 기록된 848건과 ▲독립운동가 박은식이 1920년 상하이에서 간행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1542건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 박은식은 '해외에 있으면서 단지 신문과 통신 및 개인의 입으로 전해주는 것에만 근거'했기 때문에 '숫자에 반드시 많은 부분이 빠졌을 것'이라고 '혈사'에 썼다. 그럼에도 일제가 밝힌 숫자보다 훨씬 실제에 근접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국편 류준범 연구편찬정보화실장은 "독립운동 세력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국제연맹 회의 제출 등을 위해 3·1운동 관련 정보를 최대한 정확하게 수집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했다. 박환 수원대 교수는 "3·1운동 규모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최초의 실증적 조사 연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