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병자들

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음|이재만 옮김
책과함께|1016쪽|4만8000원

"1914년의 주역들은 눈을 부릅뜨고도 보지 못하고 꿈에 사로잡힌 채 자신들이 곧 세상에 불러들일 공포의 실체를 깨닫지 못한 몽유병자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배경을 분석한 대작(大作)의 결론은 이렇다. 케임브리지대 역사학 교수인 저자는 당시의 인물들이 어떻게 행동했기에 전쟁에 이르게 됐는가를 방대한 자료를 통해 설명한다.

제1차 세계대전 전야(前夜) 유럽은 절대 강자 없이 군웅(群雄)이 할거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오스만튀르크는 거의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대륙엔 민족주의·사회주의·무정부주의가 뒤섞이고, 각국의 이해관계는 복잡했다. 가스가 가득 찬 방 같은 형국이었다. 그러나 당시 인물들은 창문을 열어 환기시키는 대신 불꽃을 튕겼다.

전쟁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암살 사건도 막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세르비아 정부는 민족주의자들의 계획을 알아채고 오스트리아에 경고했다. 그러나 적극적이지 않았다. 경고를 받은 오스트리아 역시 황태자 방문 계획을 바꾸지 않았다. 암살 사건 이후에도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러시아 등 강대국들은 정확한 의사 결정 대신 상대에게 막연한 호의를 기대하거나 악의를 의심하다 전쟁의 길로 들어섰다.

누적된 우연이 전쟁으로 폭발한 과정을 읽고 있으면 '지금은 몽유병자가 없나?'라는 걱정도 든다. 2017년 평양을 방문한 제프리 펠트먼 유엔 사무차장은 리용호 북한 외무상에게 이 책의 영어 원서를 건네며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한 요구 사항도 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