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23일(현지 시각)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고 야권 지도자인 후안 과이도(36) 국회의장을 임시 대통령으로 공식 인정하면서 베네수엘라 정국이 비상사태에 빠졌다. 반정부 시위가 격화하는 가운데 한 나라에 두 명의 대통령이 있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베네수엘라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으로 치닫고 있다.

23일 수도 카라카스 시내와 베네수엘라 주요 도시에는 수만명의 시대위가 결집해 반(反)마두로 시위를 벌였다. 거리는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로 최루가스로 뒤덮였다. 시위 과정에서 이날만 4명의 시위대가 최루탄과 고무총탄 등에 맞아 숨졌다. 최근 경찰이 시위대에 화염 방사기를 쏘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돼 국제사회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을 정도로 시위가 격화되고 있다.

23일(현지 시각)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열린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서 참가자들이 손을 번쩍 들고 있다.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지 13일 만이다. 반정부 시위의 선두에 선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은 이날 “오늘 나는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으로서 국가 행정 권력을 공식적으로 행사할 것을 맹세한다”며 스스로 임시 대통령임을 선언했다. 미국, 캐나다, 브라질 등이 과이도 의장을 공개 지지하며 베네수엘라 정국이 격랑에 빠져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성명을 내 "베네수엘라 국회가 헌법을 발동해 마두로 대통령이 불법이라고 선언했고 따라서 대통령직은 공석"이라며 "나는 과이도 국회의장을 베네수엘라의 임시 대통령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나는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 복원을 압박하기 위해 미국의 경제력과 외교력을 최대한 계속해 사용할 것"이라고 했다.

베네수엘라 일간지 엘 나시오날은 이날 백악관 관계자를 인용해 "마두로가 평화로운 방법으로 하야하면 마두로에게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제안을 미국이 했다"고 보도했다.

이후 유럽연합(EU)을 비롯해 캐나다, 브라질, 칠레, 페루, 파라과이, 콜롬비아 등 미주 대륙 우파 정부 13국이 마두로의 하야를 요구했다. 반면 러시아와 쿠바, 볼리비아, 멕시코 등 좌파 정부 국가들은 마두로를 계속 인정하겠다고 했다.

1월 23일은 베네수엘라의 독재자 마르코스 페레스 히메네스 정권이 1958년 민중봉기와 군인들의 쿠데타로 무너진 날이다. 미국은 상징적인 날을 택해 베네수엘라 국민에게 저항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주요 야권 인사의 출마를 막은 채 치러진 지난해 5월의 베네수엘라 대선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마두로는 지난 5월 대선 때 재선에 성공해 올해 1월 취임했다.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과이도 국회의장은 이날 "오늘 나는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으로서 국가 행정 권력을 공식적으로 행사할 것을 맹세한다"며 "재선거를 요청하는 군의 지원 속에 임시로 대통령을 기꺼이 맡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트위터에도 "베네수엘라는 오늘 거리에서 다시 태어나 자유와 민주주의를 추구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마두로는 물러설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이날 수도 카라카스의 대통령궁 밖에 모인 수천 명의 지지자를 상대로 한 연설에서 "헌법에 따른 대통령으로서 제국주의 미국 정부와 정치·외교 관계를 끊기로 결정했다"며 "(미국은) 꺼져라! 존엄성이 있는 베네수엘라를 떠나라"고 했다. 그러면서 "모든 미국 외교관이 떠날 수 있도록 72시간을 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이날 마두로를 '전 대통령'이라고 지칭한 성명을 내고 "마두로는 단교를 지시할 권한이 없다"고 했다.

대통령이 2명, 혼돈의 베네수엘라… 마두로 “내가 정식 대통령”, 과이도 “미국이 나를 대통령으로 인정” - 23일(현지 시각) 니콜라스 마두로(가운데)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수도 카라카스의 대통령궁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국기를 흔들고 있다(왼쪽 사진). 이날 카라카스에서 마두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서 후안 과이도(가운데) 국회의장이 주먹 쥔 손을 번쩍 들고 있다(오른쪽 사진). 이날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과이도 의장을 베네수엘라의 임시 대통령으로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캐나다와 브라질도 미국과 뜻을 함께했다. 반면 러시아와 멕시코는 현 대통령 마두로를 지지하고 있다. 경제가 무너져 난민이 속출하는 베네수엘라 국민의 비극이다.

베네수엘라의 비극은 마두로의 정치적 스승인 좌파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 시절(1999~2013)의 포퓰리즘에서 시작됐다. 민간 석유산업을 몰수하고 이를 통해 유입되는 막대한 '오일 머니'로 돈잔치를 벌였지만 유가 하락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재정이 파탄 났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베네수엘라의 경제성장률이 -5%를 기록할 것으로 봤다. 물가상승률은 1000만%에 이를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2016년과 2017년 사이 베네수엘라 국민의 평균체중은 10㎏ 줄었고, 전체 인구의 10%인 300만명의 국민이 먹고살기 위해 해외로 탈출했다.

향후 베네수엘라의 운명과 관련해 눈은 군부로 쏠리고 있다. 지난 21일 반정부 군인 27명이 수도 카라카스에서 무기를 탈취하는 등 반란을 일으켰다가 몇 시간 만에 진압됐을 정도로 아직 마두로에 대한 군부의 충성은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두로는 그동안 베네수엘라 최대 산업인 석유 부문의 각종 이권을 군부에 나눠주는 방법으로 군을 적극적으로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로이터통신은 이날 "군부의 동요가 아직 포착되지 않고 있다. 대대급 병력이 (반마두로로)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며 "'카라카스의 봄'은 빨리 올 것 같지 않다"고 했다.

마두로가 끝까지 버티면 미국과 국제사회는 베네수엘라에 추가적인 경제제재를 가하면서 더욱 거센 압박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국민의 90%가 빈곤층으로 전락한 베네수엘라 국민의 고통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